항목 ID | GC007114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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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四三遺蹟 |
영어음역 | 4·3 Yujeok |
영어의미역 | Archaeological Site for Jeju Uprising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동전 |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있는 4·3사건과 관련한 유적.
[유적의 분류]
1. 잃어버린 마을: 1948년 11월 이후 토벌대에 의해 전소된 후 현재까지 복구되지 않은 마을이다. 당시 가호수가 10호 이상인 마을을 이 범주에 넣었다.
2. 성: 1948년 12월 이후 무장대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마을 주변에 쌓은 성을 쌓았다. 성은 당시 쌓았던 것 중에서 현재 남아 있는 곳을 지칭한다.
3. 은신처: 4·3사건 동안 주민들이 숨어 지냈던 곳으로 동굴이나 자연적 엄폐물을 말한다.
4. 희생터: 4·3사건 기간 토벌대나 무장대에 의해 주민들이 집단 학살된 장소로 다섯 명 이상 희생된 곳을 말한다.
5. 민간인 수용소: 4·3사건 기간 동안 제주 지역 주민들이 토벌대에 의해 체포되어 집단 수용됐던 곳을 말한다. 대표적인 곳이 주정 공장이다.
6. 주둔지: 4·3사건 기간 군경 토벌대나 무장대가 주둔했던 곳과 지서나 경찰서가 있던 곳을 말한다.
7. 희생자 집단 묘지: 토벌대에 희생된 주민들이 집단적으로 안장되어 있는 곳으로, 현재까지 제주도 내에는 ‘백조일손지지’, ‘만벵듸공동장지’, ‘너분숭이’, ‘현의합장묘’ 등이 파악되고 있다.
8. 비석: 4·3사건 기간 동안 희생된 사람들을 위한 추모비, 충혼비, 그리고 송덕비 등을 총칭한다.
9. 역사 현장: 4·3사건과 관련하여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발생한 곳을 말한다. 대표적인 곳으로 1947년 3·1사건 당시 경찰이 주민들을 향해 발포하여 첫 희생자를 낳았던 ‘관덕정 광장’이 있다.
10. 기타: 위의 분류에 속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한 예로 1998년 4·3사건 제50주기를 맞아 ‘제50주년 4·3 학술·문화사업추진위원회’에서 신산공원에 세운 ‘4·3해원방사탑’ 등이 있다.
[제주시·북제주군의 4·3유적 분포 현황]
제주시의 4·3유적 총수는 약 400개이다. 유적 분포 수는 4·3사건 당시의 각 읍·면의 마을 수와 인구에 비례한다. 이러한 사실은 마을 수와 인구가 가장 많았던 제주읍에 유적지가 149개소로 가장 많이 남아 있고, 그 다음이 90개소인 애월면이라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유적 중 그 수가 가장 많은 곳은 당시 주민들이 학살된 희생터이다. 이 역시 제주읍에 40개소로 가장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 숫자도 자료나 증언이 부족하여 조사되지 않은 희생터가 더 있을 것으로 판단돼 당시 제주도민들이 얼마나 무참히 희생되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반면 희생자 집단 묘지의 경우 단 두 곳이 남아 있는데, 그 하나는 북촌리의 ‘너분숭이’로 이곳은 북촌 집단 학살을 상징하는 곳이다. 다른 하나는 금악리의 ‘만뱅듸 공동장지’로,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50년 8월 20일 모슬포의 송악산 섯알오름 자락에서 희생된 한림 등지의 예비 검속자들을 공동으로 안장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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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주시·북제주군의 4·3유적 분포 현황
[의의와 평가]
4·3유적은 제주도 곳곳에 산재해 있다. 그동안 일부에서 4·3유적의 중요성을 깨닫고 보존의 필요성을 제기해 왔으나, 여전히 방치되고 훼손되어 있는 상태이다. 4·3사건의 성격과 많은 민간인 피해를 낳은 사건의 결과를 고려한다면 4·3유적 보존의 의의는 ‘후세에 길이 남겨 통일 운동의 역사, 평화와 인권 교육의 장으로 삼아야 할 가치가 있다’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