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115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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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濟州道- |
영어음역 | Jejudo Yacheika |
영어의미역 | Yacheika in Jeju-do |
분야 |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동전 |
[정의]
일제 강점기 제주도 지역에 있었던 사회주의 단체.
[설립목적]
과거 지식인 중심에서 노동자·농민 중심의 조직을 결성하여 조선공산당의 재건을 목표로 설립되었다.
[변천]
1930년 혁우동맹은 구좌면 일대에서 강창보를 중심으로 결성되었으나 뚜렷한 활동 사항은 없었다. 1931년 5월 15일 신우면 애월리 김원희의 결혼식에 참석한 강창보·신재홍·오대진·이익우·김한정 등은 그날 밤 김원희의 방에서 숙박하였다가 5월 16일 새벽 강창보의 제의에 의해 새롭게 조직을 정비하여 조선공산당 제주도 야체이카를 결성하였다.
결성 자리에서 강창보는 ‘1928년 국제공산당에서 나온 12월 테제에 의하여 과거 지식인 중심 운동과 파쟁을 일축하고 노동자·농민을 토대로 함으로써 조직할 것’을 제의한 후, ‘현재 조선공산당은 존재하여 있지 아니하나 장래에 재건되면 정식으로 연락을 취할 것’을 전제로 하였다. 조선공산당 제주도 야체이카를 조직함으로써 단원들은 전국적인 조선공산당의 재건운동에 착수하였다.
결성 직후 제주도 야체이카의 각 지역별 담당자들은 지역별로 운동가 확보에 나섬과 동시에 제주도 야체이카의 노선과 활동 방침을 확립하기 위하여 여러 번에 걸쳐 회합하였다.
1931년 6월 13일 송성철의 건의를 받아들인 강창보는 제주읍에서 제주도 자전거대회가 열리는 기회를 이용하여 각 지역의 운동가들을 모이게 하여 제주도 소년운동지도자 간담회를 개최하였다.
간담회는 부태환·박찬규·문재진·홍순일·오문규·김민화·김태안·김한정·문달모·김중흡 등 각 지역별 활동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으며 이 자리에서는 소년의 교양문제, 체육문제, 부인문제, 농민문제 등이 협의되었다.
동년 6월 14일 제주도 야체이카 단원들은 장종식의 집에서 회합하여 ‘제주도 농민요구투쟁동맹운동에 관한 테제 비판회’를 개최하였다. 이 자리는 12월 테제 및 요구동맹테제의 방침에 의거하여 제주도 야체이카의 노선 및 활동 방침을 각 지역의 운동가들에게 전달하는 자리였다고 할 수 있다.
제주도 야체이카는 운동 방침을 논의·확정한 후 각 지역별로 조직의 확대에 주력하였고 당시 빈발하였던 대중운동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1932년 초 대판부 특별고등과에서 조사한 제주도의 치안 상황에 따르면, 제주도 야체이카가 결성된 1931년 5월~1932년 1월까지 발생한 사회운동 사건은 총 7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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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주도 야체이카 결성 이후의 사회운동 사건
그중 주목되는 사건은 산지항 축항공사 노동자들의 파업 사건과 구좌면 해녀투쟁 사건이었다. 이들 사건은 생산 대중이 일으켰던 투쟁으로서 제주도 야체이카의 운동 노선과 일치하고 있었다.
제주도 야체이카는 1931년 말부터 전개된 구좌면 해녀들의 해녀조합에 대한 투쟁에 관여하였으며, 제주도 야체이카의 구좌면 담당이었던 신재홍은 1931년 7월 초순경 오문규·문도배와 회합하여 장차 구좌야체이카를 조직할 것을 생각하여 그 훈련을 위하여 제주도 야체이카와 비슷한 조직을 결성하였다.
오문규·문도배 등은 지금까지의 어용 해녀조합과는 별도로 해녀를 본위로 하고 해녀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 조합과 농민의 이익을 도모할 수 있는 농민단체를 조직하도록 유도하기로 하였다. 특히 1931년 후반부터는 해녀들의 관제 해녀조합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고 있는 때여서 해녀들을 위주로 한 이들 구좌면 운동가들은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제주도 야체이카는 1932년 1월 일어난 해녀투쟁 사건 관련자의 검속 과정에서 구좌면 운동가들이 대거 검거되자 그 실체가 일제에 드러났다. 이에 따라 일제는 1932년 3월 전도에 걸쳐서 청년 운동가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를 실시하여 강창보를 비롯하여 운동가 100여 명을 체포하였다.
일본 경찰은 혹독한 고문을 통해 제주도 야체이카의 실체를 밝혀내고 직접 관련자 40명을 재판에 회부하여 최종적으로 22명에게 실형을 언도함으로써 제주도 야체이카는 해체되었다.
[활동사항]
제주도 야체이카 당원들인 강창보·이익우·오대진·김한정·신재홍 등은 각각 지역을 나누어 활동하였다. 강창보는 제주읍과 신좌면 지역을 담당하였다. 강창보는 1931년 7월 중 장종식과 부태환을 제주읍 내 이태윤의 집에서 만나 제주도 야체이카의 당외 분자로 가입시켰다.
강창보·장종식·부태환 등 세 사람은 제주읍 내의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강창보를 책임자로 하고, 여성부·모풀부는 부태환, 청년부는 장종식을 담당자로 정하였으나 장종식은 1931년 7월 발생한 제주청년동맹원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이에 따라 1932년 1월 1일 강창보와 부태환은 장종식 대신 박찬규를 당외 분자로 가입시켰다. 이들은 1월 6일 부태환의 집에서 회합하고 제주읍 내의 조직을 재건설하여 적색구원부·청년부·여성부를 각각 두었다.
이익우는 신우면과 구우면 지역을 담당하였다. 이익우는 1931년 12월 중 김태안과 고운선 등을 조직에 합류시켰고 한림면 내에 자체 조직을 두었다. 한림면 야체이카는 각 부서를 나누어 고운선은 청년부와 재정부를, 김태안은 여성부를, 이익우는 농민부를 담당하여 활동하였다.
오대진은 대정면과 우면 지역을 담당하였다. 오대진은 1931년 9월 하순경 대정면 하모리 이도일의 주조(酒造) 사무소에서 이신호를 만나 제주도 야체이카의 당외 분자로 가입시켰다. 제주도 야체이카 구성원 가운데 제주도 남부의 좌면과 중면 지역을 담당하였던 김한정도 오대진의 지도를 받았다고 한다. 김한정은 좌면과 중면 지역을 담당하였다.
신재홍은 구좌면·정의면·서중면·동중면 지역을 담당하였다. 신재홍은 1931년 7월 초순 구좌면 세화리 경찰관 주재소 부근 소나무밭에서 오문규, 문도배와 회합하여 이들을 당원으로 가입시켰다.
또한 신재홍은 구좌면 연평리에 거주하는 강관순, 김성오와 회합하여 당원으로 확보하였으며, 연평리에서는 마을의 각 단체를 통일적으로 규합시킬 목적으로 비밀 결사인 ‘적(赤)’을 조직하였다. 연평리 지역의 활동이 활발하였던 이유는 구좌면 야체이카의 책임자인 신재홍이 연평리 지역 출신이었던 데서 찾을 수 있다.
신재홍·오문규·문도배는 1931년 8월 하순부터 11월경까지 4회에 걸친 회합을 가지고 농민회, 청년동맹, 소년회 등에 대하여 사회주의 의식의 보급과 실천 방법 등에 대한 협의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