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03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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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麗時代 |
영어의미역 | Goryeo Dynast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김낙진 |
[정의]
918년부터 1392년까지 충청북도 진천 지역의 역사와 문화.
[고려의 건국과 진천]
고려는 918년 왕건(王建)의 건국 이래 1392년 이성계(李成桂)의 조선에 멸망할 때까지 34대 474년 간 존속한 왕조이다. 고려는 건국 후 후백제와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특히 고려와 후백제와의 대결은 양국의 접경지대인 보은·회인·문의·청주·제천·충주 일대의 충청북도 지역과 상주·김천·성주 등지의 경상북도 지역 일대에서 벌어졌다. 이런 점에서 진천은 고려의 남방 한계선 역할을 하였다. 청주의 북쪽에 자리한 진천은 고려의 남방 전초기지로서 가장 확실하게 왕건의 세력권 아래 놓여 있었고, 청주의 남쪽에 자리한 매곡성은 후백제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진천을 비롯한 충청북도 지방은 후백제와 고려가 대치하고 있는 접경 지역으로서 일대의 호족 세력에 대한 통제력이 누가 강한가에 따라 이들의 향배를 결정할 수 있었다. 진천의 호족들은 일찍이 왕건에게 귀부함으로써 그의 강력한 지지 세력이 되었다. 고려 건국 초 이 지역을 강주(降州)라고 한 것도 진천의 호족들이 왕건에게 내항(来降)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명칭 개칭]
강주라는 명칭은 얼마 후 진주(鎭州)로 개칭하였는데, 이는 왕건이 궁예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데 대한 청주인의 불만과 관계가 있었다. 청주 지방 세력의 반란은 이제 막 왕위에 오른 왕건에게는 커다란 위협이었다. 태조는 청주인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마군장군 홍유(洪儒)[ ?~936]와 유금필(庾黔弼)[ ?~941]에게 군사를 주어 진천에 주둔하게 하였다. 진천은 청주 세력의 반란을 진압하는 전초 기지가 되었다. 진천 호족의 도움을 받아 청주 반란군을 진압했기 때문에 진천을 강주에서 진주로 개칭하였다. 즉 청주 세력을 진압(鎮圧)한 곳, 혹은 고려군이 진수(鎮守)한 곳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지방제도의 정비와 진천]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뒤에는 국가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940년(태조 23)에는 주·부·군·현 등의 명칭을 고쳤다. 광종 때에는 중앙에서 왕권의 강화를 위한 일련의 개혁정치와 정치적 숙청을 단행하였다. 그 결과 왕권의 안정을 확보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성종 대에는 지방에 대한 통제에 나섰다. 먼저 983년(성종 2)에 전국의 주요 지역에 12목을 설치하였다. 진천은 12목 가운데 청주목에 소속되었다. 그 후 현종 대에 이르러 전국을 개성부와 경기, 그리고 5도와 양계로 나누고 그 밑에 도호부·목·주·부·군·현·진 등을 소속시켰다. 이 가운데 5도는 일반 행정구역으로 양광도·경상도·전라도·교주도·서해도 등을 말하며, 진천은 양광도의 청주목 관하에 들어가 있었다.
[무인정권시대의 진천]
고려의 문벌 귀족사회는 귀족 간의 갈등으로 동요하게 되면서 일련의 정치적 혼란이 야기되었다. 이자겸(李資謙)[ ?~1126]의 난과 묘청(妙淸)[ ?~1135]의 난, 그리고 그 후 문신정권의 종말을 고한 무신란의 발생에 이르기까지 큰 격변을 겪었다. 무신란은 1170년(의종 24)에 정중부(鄭中夫)[1106~1179]·이의방(李義方)[ ?~1174]·이고(李高)[ ?~1171] 등에 의해 주도되어 일어났다. 이들은 무신란의 3거두로서 문신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처음에는 이고가 무인집정이 되어 권력을 농단하였고, 이고의 전횡을 꺼린 이의방이 이고를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무인집정이 된 이의방은 정중부에 의해 살해되었으며, 정중부는 청년장군 경대승(慶大升)[1154~1183]에 의해 제거되었다. 권력을 쥔 경대승은 정중부 제거에 불만을 가진 많은 무신들에 의해 모두의 적으로 돌려져 결국 병사하였으며, 경주로 피신을 가있던 이의민(李義旼)[ ?~1196]이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이의민도 최충헌(崔忠獻)[1149~1219]에 의해 제거되면서 최씨 무인정권이 성립되었다. 그 후 4대 60여 년간 정권을 유지하다가 김준(金俊)과 임연(林衍)[ ?~1270]에 의해 최의(崔竩)[ ?~1258]가 피살됨으로써 무인정권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최씨 무인정권을 무너뜨린 임연은 상산임씨로 진천의 구산동(亀山洞)에서 태어났다. 임연의 어머니는 진천 아전의 딸이었다. 임연은 어려서부터 힘이 셌으며, 그가 벼슬을 얻은 것은 몽고병이 침입했을 때 전천의 주민들을 이끌고 적을 막았는데 그 공으로 대정(隊正)에 임명되면서부터였다. 그 후 김준과의 인연으로 그의 도움을 받아 낭장의 벼슬을 얻었으며, 최의를 죽이는데 김준을 도운 공으로 위사공신(衛社功臣)에 오르기도 하였다. 청주의 속현이었던 진주(鎭州)가 창의현(彰義縣)으로 승격되었던 것은 위사공신이 된 임연의 고향이기 때문이었다. 임연은 여러 관직을 거쳐 추밀원부사(枢密院副使)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김준의 전횡을 꺼린 원종(元宗)[1219~1274, 고려 24대 왕]이 임연을 이용하여 그를 제거하였다. 임연은 김준을 제거하고 최고 집정자 자리에 올랐다. 임연은 권력을 장악한 후 자신을 제거하려고 하는 원종을 폐위하고 태자를 세웠다. 그러나 몽고의 압력으로 원종을 할 수 없이 복귀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탄(崔坦)의 반란으로 서북면 지역에 동령부가 설치되어 이 지역이 몽고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원종은 권력이 임연에게 있는 것을 꺼려 권력을 되찾고자 하였다. 이에 몽고에 원병을 요청하였으며, 몽고병이 개경에 들어와 주둔하자 큰 정치적 간섭을 받게 되었다. 임연은 강화도에서 결사 항전할 것을 결심하고 몽고와의 전쟁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심한 압박감으로 병사하고, 그의 아들 임유무(林惟茂)[ ?~1270]가 권력을 계승했으나 그 역시 매부(妹夫)인 홍문계(洪文系)에 의해 살해됨으로써 100년간 이어진 무인정권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와 함께 창의현으로 승격되었던 진천도 다시 진주로 원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