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05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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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宜寧南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평산리|진천읍 원덕리 |
집필자 | 강민식 |
세거지 |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평산리|백곡면 명암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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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성촌 |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평산리|백곡면 명암리 |
입향시기/연도 | 조선 전기 |
성씨시조 | 남군보 |
[정의]
남군보를 시조로 하는 충청북도 진천군 세거성씨.
[연원]
의령남씨(宜寧南氏)는 755년(경덕왕 14)에 안렴사(按廉使)로 일본에 다녀오다 풍랑을 만나 신라에 표류했던 중국 봉양부(鳳陽府) 여남(汝南) 사람 김충(金忠)이 신라에 정착하면서 비롯되었다. 경덕왕이 김충에게 남씨를 사성하고 영양현(英陽縣)을 식읍으로 내리자, 김충은 남민(南敏)으로 개명하였다. 남민의 7세손 남진용(南鎭勇)의 둘째 아들 남군보(南君甫)가 의령(宜寧)에 본관을 둔 의령남씨의 시조이다. 남씨의 본관은 50본 이상으로 알려져 있지만, 남민의 세 아들이 시조가 된 영양(英陽)·의령·고성(固城) 3본을 제외한 나머지 본은 정확하지 않다. 현재는 영양·의령·고성 3본 역시 합본되었다.
[입향경위]
의령남씨 중 진천군에 입향한 인물과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의 토성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보다 앞선 시기에는 두드러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 초기 좌의정을 역임한 충간공(忠簡公) 남지(南智)의 묘소와 신도비가 진천군 문백면 평산리 안능에 자리하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500여 년 전에 의령남씨가 진천군에 정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현황]
『상산지(常山誌)』의 능묘조에 남지 묘소가 보이고, 충신에 충장공(忠壯公) 남연년(南延年)이 기록되어 있다. 남지는 개국공신 남재(南在)의 손자로, 17세에 벼슬에 올라 1449년(세종 31) 우의정을 거쳐 1451년(문종 1) 좌의정에 올랐다. 계유정난(癸酉靖難)에 병으로 화를 피하고, 1489년(성종 20) 손자 남기(南祈)의 상소로 시호를 받았다. 남연년은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1728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을 때 청주영장(淸州營將)으로 반란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인물이다. 진천군 백곡면 명암리에 신도비와 묘소가 있다.
2000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진천군 관내에 거주하는 의령남씨는 103가구 310명으로 나타났다. 현재는 진천군 문백면 평산리 안능마을[윗배티]에 대성을 이루며 세거(世居)하고 있다. 남연년의 묘가 있는 백곡면 명암리 명암마을 60여 가구 가운데에도 의령남씨와 강릉김씨가 대성을 이루어 살고 있다.
[관련유적]
진천 남지 묘소 및 신도비는 진천군 문백면 평산리 산 18-1번지에 있다. 1988년 9월 30일 충청북도 기념물 제80호로 지정되었다. 묘소는 사다리꼴 평면이다. 묘소 입구에는 8세손 남구만(南九萬)이 지은 신도비가 있다. 충장공 남연년은 청주 표충사에 배향되었고, 묘소 앞에는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유고를 모아 편찬한 남충장공시고판목(南忠壯公詩稿板木)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18호로 지정되었고, 고향인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에는 충신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