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06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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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宋國瞻 |
영어음역 | Song, kuk-chom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김낙진 |
[정의]
고려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진천(鎭川). 찬화공신(贊化功臣) 상산백(常山伯) 송인(宋仁)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중서문하평장사(中書門下平章事)를 지낸 송원겸(宋元謙)이다. 형제는 평장사 송순(宋恂)과 전리판서 송희(宋憘)가 있다.
[활동사항]
송국첨(宋國瞻)[?~1250]은 1212년인 강종 즉위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직사관(直司館)이 되었다. 1226년(고종 13) 금나라의 장수 우가하(于哥下)가 침입하자 감찰어사(監察御史)로 우군장(右軍將)이 되어, 김희제(金希磾)·손습경(孫襲卿)과 함께 보병 및 기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출전하여 우가하를 물리치고 개선하였다.
정언을 거쳐 판비서성사(判秘書省事)가 된 뒤 정방에 들어갔으나 아부를 하지 않고 원칙을 지키려 하여 최우(崔瑀)가 좋아하지 않았다. 뒤에 박훤(朴萱)이 권세를 크게 부리자 정방을 떠났다. 1231년(고종 18) 몽고가 침입하자 회안공(淮安公) 정(侹)을 따라 살리타이[撒禮塔]와 강화를 체결하는 데 공을 세웠다. 형부상서로 경상도순문사로 나갔을 때 송광사의 중으로서 국가와 백성에게 막대한 폐해를 끼치던 최우의 서자인 만종(万宗)·만전(万全)[이름은 항(沆)]을 탄핵하여 그들을 불러들이게 하였다.
그러나 곧 최항의 참소로 동경부유수(東京副留守)로 좌천되었고, 1249년(고종 36) 최항이 집권하자 우산기상시를 거쳐 지서북면병마사(知西北面兵馬事)로 좌천된 뒤 다시 개경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문장에 능하고 책임감이 강한 유능한 관리였다.
[묘소]
묘소는 실전되고 없으며, 진천군 덕산면 두촌리 매산 상산백(常山伯) 묘역에 단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