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06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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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公升 |
영어음역 | I Gongseung |
이칭/별칭 | 달부(達夫),문정(文貞),추월재(秋月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
시대 | 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전호수 |
[정의]
고려 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달부(達夫), 호는 추월재(秋月齋). 고려 태조 때의 공신인 이희능(李希能)의 6세손이다.
[활동사항]
이공승(李公升)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문장이 탁월하였다. 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으며, 뒤이어 우정언(右正言)을 지냈다. 1148년(의종 2)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서 사신이 되어 금나라에 다녀왔다. 당시 사신으로 가면 수행하는 군사들에게 은 1근씩을 거두는 것이 상례였으나 전혀 거두지 않아 사람들이 청렴함에 감탄하였다. 이공승의 청렴함은 왕에게까지 알려져 청녕재(淸寧齋)에서 달밤놀이를 하면서 “가을 달이 맑게 개어 한 점 티끌도 없으니 정히 이공승의 가슴 속과 같다.”라고 하였다 한다. 이로 인해 ‘추월재’라는 호(號)를 얻게 되었다.
1149년(의종 3) 우사간지제고(右司諫知制誥)가 되었고, 1155년(의종 9)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고시관을 맡아 김단보(金端寶)·황문장(黃文莊) 등을 합격시켰다. 이어 동북면병마부사를 거쳐, 이듬해 추밀원좌부승선(樞密院左副承宣)을 역임하는 등 의종의 총애를 받았다. 1157년(의종 11) 천례(賤隷) 출신 환관 정함(鄭諴)을 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祗候)에 임명하는 데 필요한 고신(告身)[임명장]에, 우승선 좌간의대부(右承宣左諫議大夫)로서 왕의 압력에 굴복하여 서명하였다.
그러나 뒤이어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에 올라서는 왕이 “만약 듣지 않는다면 모두 죽여서 젖을 담을 것이다.”라며 또다시 고신 서명을 강요했으나 간관 때의 잘못을 깨달았기 때문에 조서를 받들 수 없다며 이를 거부하였다. 이에 한때 왕의 견책을 받았으나 이내 다시 불려가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에 임명되었다. 이어서 1161년(의종 15)에는 지상서이부사(知尙書吏部事)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한림학사를 역임하였다.
1166년(의종 20) 치제(致祭) 때 집례(執禮)가 준비되었다고 허위로 보고해 추밀원지주사에서 형부상서(刑部尙書)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다시 이듬해 추밀원부사태자빈객(樞密院副使太子賓客)이 되었고, 왕의 총신으로 각종 향연에 참석해 창화(唱和)하였다. 뒤이어 동지추밀원사이부상서(同知樞密院事吏部尙書)를 거쳐 1168년(의종 22)에는 참지정사판공부사(參知政事判工部事)로 치사(致仕)하였다.
1170년(의종 24) 정중부(鄭仲夫) 등이 일으킨 무신정변 때에는 화를 모면했으나, 1173년(명종 3) 김보당(金甫當)이 일으킨 반무신란(反武臣亂)으로 인해 다시 문관에 대한 탄압이 재개되었을 때 불일사(佛日寺)에 숨어 있다가 이의방(李義方)에게 잡혔다. 이의방이 의종 때 연복정(延福亭)의 대역사를 일으킴으로써 백성의 원망을 샀던 일을 들어 죽이려 하였으나, 무신의 호응을 받고 있던 문생 문극겸(文克謙)의 도움으로 죽음을 모면하였다. 1175년(명종 5) 국왕의 우대를 받아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에 올랐고, 1183년(명종 13)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공승은 수염이 아름답고 동안(童顔)으로 늙어 보이지 않았으며, 행실이 고결하고 생산(生産)을 일삼지 않고 청렴하였다. 그러나 남의 허물을 용납하지 못하는 성품으로 보이는 즉시 모욕을 주며 꾸짖었다. 내시 조강실(趙剛實)이 좌창(左倉)을 관리하면서 부정을 저지르자 꾸짖었으며, 승(僧) 관원(觀遠)이 대신들과 어울리자 그를 데리고 온 문극겸을 나무라고 관원을 쫓아버린 뒤 기뻐하였다.
의종이 관북궁(館北宮)에 굴실(窟室)을 만들고 금과 옥으로 사치스럽게 장식하여 환관 및 궁녀들과 가무연락(歌舞宴樂)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자, 왕의 시에 화답하여 “공명과 부귀를 모두 꽃 밑의 3배 술잔에 쫓아 보냈다[功名富貴盡花下之三盃].”라고 창화시(唱和詩)를 지어 국왕을 경계하였다. 이러한 강직한 성품으로 인해 배척당하였는데, 사람들은 이 일을 두고 시참(詩讖)[우연히 지은 시가 뒷일과 꼭 맞게 되는 일]이라고 하였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사양리에 1726년(영조 2)에 그린 영정을 모신 영당이 있으며, 충청남도 홍성군 홍동면 화신리와 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 창천리 구장산(口獐山) 아래에도 추월재라는 영당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