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06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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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寅爀 |
영어음역 | I Inhyeok |
이칭/별칭 | 중장(仲章),매산(梅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생곡마을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전호수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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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생곡마을 |
성별 | 남 |
생년 | 1634년 |
몰년 | 1701년 |
본관 | 경주(慶州) |
대표관직 | 사복시정 |
[정의]
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중장(仲章), 호는 매산(梅山).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이다. 할아버지는 판서 벽오(碧梧) 이시발(李時發)이며, 아버지는 이조판서를 지낸 이경휘(李慶徽)이다. 생곡(生谷) 이인환(李仁煥)이 형이며, 동생으로는 이인욱(李璘煜)·이인찬(李寅燦)·이인희(李寅熹)·이인식(李寅烒)이 있다.
[활동사항]
이인혁(李寅爀)[1634~1701]은 지금의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생곡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유희를 좋아하지 않고 범상함이 남달라 사람들이 ‘삿같 밑의 재상[笠下宰相]’이라고 하였다. 1657년(효종 8) 식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672년(현종 13) 처음으로 벼슬에 나아가 군수가 되었다. 1679년(숙종 5) 예송논쟁(禮訟論爭)에 의해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유배되었을 때 그를 옹호하던 형 이인환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자, 자신도 형을 따라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생곡마을로 돌아와 한가로이 지내면서 학문에 힘썼다.
1689년(숙종 15) 왕비 민씨(閔氏)를 폐하고 희빈장씨(嬉嬪張氏)를 왕비로 삼자 양곡(陽谷) 오두인(吳斗寅)을 소두(疏頭)로 삼아 종제(從弟) 7명과 불가함을 아뢰는 상소를 하였다.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희빈장씨가 폐서인(廢庶人)이 되고 민비가 다시 복위됨에 따라 61세의 노령으로 나주목사로 관직에 나아갔다. 나주목사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생불태수(生佛太守)’, ‘성인관장(聖人官長)’이라고 칭송하였다. 64세에 사복시정에 올랐으며, 77세를 일기로 운명하였다.
[상훈과 추모]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환희리에 있던 송천서원(松泉書院)에 배향이 되었다. 송천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이후 복원되지 못하다가, 1975년 청원군 오창면 양지리로 이전하여 복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