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06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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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任魯 |
영어음역 | Im Ro |
이칭/별칭 | 득여(得汝),영서거사(潁西居士)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전호수 |
[정의]
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에 유배된 문신.
[가계]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득여(得汝), 호는 영서거사(穎西居士). 판서 임방(任埅)의 현손으로 아버지는 사간원대사간 임종주(任宗周)이다.
[활동사항]
임로(任魯)[1755~1828]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세상의 명리화색(名利貨色)에는 일절 욕심이 없었다. 1777년(정조 1) 음서로 관직에 나갔으나 아버지가 당대의 세도가 홍국영(洪國榮)에게 몰려 단천(端川)으로 유배되었다가 세상을 떠나자, 벼슬을 단념하고 동교(東郊)에 살면서 스스로 영서거사라고 이름 짓고 학문에만 전심하면서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꺼렸다. 자연히 가정 형편이 빈곤해졌으나 개의치 않고 경서(經書)를 비롯한 여러 서책들을 두루 읽으며 학문에 힘쓰는 한편, 묵묵히 도(道)를 실천하면서 수양에 힘썼다.
학문이 높아지자 나라의 부름이 이어져서 1809년(순조 9) 제용감부봉사(濟用監副奉事)로 다시 관직에 나갔으며, 상서원직장·사복시주부 등을 역임하였다. 의금부도사와 경모궁령(景慕宮令)을 거쳐, 외직으로 신령현감·충원현감[충원은 지금의 충주]을 역임하였다. 충원현감으로 있을 때 백성들을 괴롭히는 간악한 아전들을 다스리는 한편, 횡포가 심한 토반(土班)들을 억압해 지방 행정 질서와 풍속을 바로잡았다.
그러나 피해를 입은 세력들이 반감을 품고 일치단결해 충청좌도암행어사 서좌보(徐左輔)에게 무고함으로써 지방을 잘못 다스린다는 억울한 죄명을 쓰고 1822년(순조 22) 지금의 진천 지역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누명을 벗고 석방되었으나, 이후로는 일체의 세상사를 등지고 두문불출하면서 독서로 여생을 보냈다. 학문적으로는 주기론(主氣論)을 주장한 임성주(任聖周)를 스승으로 모셨다.
[저술 및 작품]
『영서집(穎西集)』을 비롯하여 산고(散稿) 약간 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