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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식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700820
한자 洪景植
영어음역 Hong Kyung-Sick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사양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제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출신지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사양리 범바위마을
성별
생년 1889년 8월 3일연표보기
몰년 1961년 4월 28일연표보기
본관 풍산
대표경력 한족회 회원

[정의]

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풍산(豊山). 1889년(고종 26) 8월 3일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사양리 범바위마을에서 출생하였다. 만주에서 한족회 간부로 독립운동을 하다, 서울에 대한통의부 지부를 설치해 독립운동을 하였다.

[활동사항]

홍경식(洪景植)[1889~1961]은 1910년 일제가 나라를 강점하자 부친인 전 참판 홍승헌(洪承憲), 전 참판 정원하(鄭元夏)를 따라 남만주 서간도 환인현(桓仁縣) 횡도천(橫道川)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후에 교민자치기구인 한족회(韓族會) 간부로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20년에는 봉천성 연락기관장인 윤세용(尹世茸)의 지령을 받고 이병욱(李炳旭)과 함께 권총 15정과 폭탄을 휴대하고 국내로 들어오다가 만주 봉천역에서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21년 4월 26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 제7호[정치에 관한 법령]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 후 1922년 5월 6일 출옥하였다. 1922년 11월 13일 홍경식이병욱·유한기(柳漢基)·박정양(朴貞陽) 등과 함께 서울 종로구 효제동 13번지[대학로 36-13] 자택을 거점으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서울지부를 설치하였다. 지부장이 된 그는 군자금을 마련하는 한편, 각종 무기를 매입하여 일제 요인과 친일파의 처단 및 응징과 일제 관공서 파괴를 계획하였다.

그러나 1924년 11월 10일 일제의 밀정인 임방(林方)의 고발로 일본 경찰에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1925년 12월 27일 소위 제령 제7호 위반 및 강도 공갈죄로 모두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아 경성형무소[서울 서대문]에서 옥고를 치렀다. 1932년 10월 출옥 후 1961년에 병고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정부에서는 홍경식의 공적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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