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17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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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영구리 542[영구리길 60-125]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상일 |
[개설]
「진천 영수사 영산회괘불탱(鎭川 靈水寺 靈山會掛佛幀)」은 본래 진천읍 상계리에 있던 백련암(白蓮庵)에서 1653년(효종 4)에 제작되었다가 백련암이 폐사되면서 지금의 영수사로 옮겨 왔다. 초파일 등의 중요한 행사 때 절 마당에 걸어 두고 많은 신도들이 한꺼번에 예불할 수 있도록 사용한다.
진천 지역 유일한 조선시대의 괘불탱으로 삼베에 채색으로 그렸으며 길이 835.5㎝, 너비 579㎝의 초대형 크기이다. 석가모니 부처가 영취산에서 『법화경(法華經)』을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한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로서 십팔대 보살, 아난(阿難)과 가섭(迦葉) 및 사리불(舍利佛), 십육 나한, 제석(帝釋)과 범천(梵天), 사천왕(四天王)을 비롯한 신중(神衆), 청문(聽聞)하는 대중들을 묘사한 복잡한 군도(群圖)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구도는 본존불인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상단에는 십육 나한·금강역사·용녀·용왕·야차·건달바·아수라·가루라·벽지불·시방제불·비천들이 있고, 중단에는 보살·아난·가섭·제석·범천·사천왕이, 하단에는 사리불과 고려 불화에 등장하는 마가다국의 아사세 왕과 위제희 왕비 등의 무리 또는 전륜성왕의 무리로 여겨지는 여러 대중이 운집하여 부처의 설법을 청하는 장면이다.
십팔대 보살을 비롯한 제석과 범천 등 여러 권속들이 배치된 좌우 대칭의 복잡한 구도이나, 하단의 여러 성중(聖衆)들의 배치는 틀에 박힌 좌우 대칭 구도에서 벗어나 있다.
선은 굵고 가늚이 없이 일정한 선으로 그었고, 채색은 홍색을 주조 색으로 하여 녹색, 청색, 황토색, 주황색 따위의 중간 색조를 옅게 써서 복잡하고 화려한 문양 대신에 밝고 투명한 색조로 표현하여 화면을 차분하게 보이도록 하였다. 특히 본존불의 키 모양의 광배(光背)에 두광(頭光)은 홍색, 신광(身光)은 청색으로 처리한 보색의 대비가 조화를 이루어 본존불이 돋보이는 뛰어난 색조 사용 수법을 볼 수 있다.
중앙 화기(畵記)에는 왕·왕비·세자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내용이 있고, 그 아래에 괘불 조성에 사용된 그림의 바탕이 되는 삼베를 시주한 바탕 시주와 후배지(後排紙) 시주, 황금·주홍·청색인 이청(二靑)·대청(大靑)의 안료 시주, 꿀인 청밀 시주, 소금인 식염 시주, 장을 의미하는 말장 등의 음식물을 공양한 시주자의 이름이 보인다.
또한 괘불탱의 상단부를 장엄하는 원경(圓鏡)·영락(瓔珞)·복장(腹藏)·등촉(燈燭) 등 의식용 물건을 댄 수많은 시주자 명단에서 불교의 대중화를 확인할 수 있다. 괘불을 그린 화원은 명옥(明玉)·소읍(小揖)·현욱(玄旭)·법능(法能) 등 네 명의 승려로 되어 있다.
조선 후기의 불교 회화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유물로서 1977년 12월 7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44호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3월 12일 보물 제1551호로 변경되었다.
[야단법석을 그린 괘불]
괘불이란 탱화(幀畵)의 일종으로 야외 법회 때 쓰는 의식용 불화를 말한다. 큰 재(齋)나 초파일처럼 대중이 모이는 날 법당 앞에 걸어 놓고 예불을 올렸다. 본존불을 대신하여 사용하는 특수한 용도의 불화인 만큼 법회의 종류에 따라 내거는 괘불이 달랐다.
죽은 자가 석가모니를 만나 복락을 누리기를 기원하는 영산재(靈山齋)에서는 영산회상도를, 죽은 후에 행할 불사(佛事)를 생전에 미리 지내는 예수재(預修齋)나 구천을 떠돌아다니는 귀신과 아귀(餓鬼)를 달래고 천도(薦度)하는 수륙재(水陸齋)에서는 지장회상도(地藏會上圖)나 명부시왕도(冥府十王圖)를 사용했다. 족자형의 불화를 대형화한 것이기 때문에 크기가 보통 6~7m이며, 10m 넘는 것도 있다.
그림의 기법과 형식 등은 일반 탱화와 거의 같지만 내용이 좀 더 복잡하고 많은 불보살과 성중을 등장시킨 점이 특징이다. 비단이나 삼베에 그린다는 재료의 취약성 때문에 현존하는 대부분의 작품들은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것들이다.
조선 후기에는 『법화경』이 유행하면서 석가모니가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영산회상도가 가장 많이 제작되었고, 그다음으로 약사불·아미타불·미륵불 순이다. 「진천 영수사 영산회괘불탱」 또한 영산회상도이다. 수많은 불보살과 성중이 한곳에 모여 야단법석(野壇法席)을 열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흔히 말하는 야단법석은 떠들썩하고 시끄러운 모습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지만 본래는 불교 용어이다. ‘야단(野壇)’이란 ‘야외에 세운 단’이란 뜻이고, ‘법석(法席)’은 ‘법회석중(法會席中)’의 줄임말로 ‘불법을 펴는 자리’라는 뜻이다. 즉 ‘야외에 자리를 마련하여 부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라는 뜻이다.
법당이 좁아 많은 사람들을 다 수용할 수 없으므로 야외에 단을 펴고 설법을 하는 것이다. 그만큼 말씀을 듣고자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석가모니가 야외에 단을 펴고 설법을 할 때 가장 많은 사람이 모인 것은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했을 때로 자그마치 300만 명이나 모였다고 한다.
야단법석에는 사람이 많이 모이다 보니 질서가 없고 시끌벅적하고 어수선하게 된다. 이처럼 경황이 없고 시끌벅적한 상태를 가리켜 비유적으로 쓰이던 말이 일반화되어 일상생활에서 널리 쓰이게 된 것이다.
그러나 불교적인 의미로는 석가모니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대사의 설법을 듣는 법회에 회중(會衆)이 둘러앉아서 불경을 읽는 법연(法筵)을 일컫는 말이니, 매우 엄숙한 자리를 뜻하였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진천 영수사 영산회괘불탱」 속의 야단법석 모습을 살펴보면 매우 질서정연하고 엄숙하고 장엄하다. 그 어디에서도 무질서하고 시끌벅적하고 어수선함을 찾을 수 없다. 야단법석 본래의 모습인 것이다.
[영수사를 품어 안은 두타산]
영수사는 두타산(頭陀山)의 서쪽 계곡에 있는 작은 사찰이다. 1871년(고종 8)에 간행된 『호서읍지(湖西邑誌)』에 영수사에 대한 기록이 처음 나타나는데, 진천현 동쪽 15리에 있다는 기록이 전부여서 사찰의 연혁을 자세히 알 수 없다. 광복 이후에 작은 암자로 운영하면서 영수암(靈水庵)이라 부르다가 1980년대 이후 법당과 요사를 신축하는 등 사찰 규모를 확장하고 절 이름도 원래대로 영수사로 다시 고쳤다.
영수사를 품어 안은 두타산은 차령산맥(車嶺山脈)의 한 줄기로서 진천군 초평면과 증평군 증평읍 및 도안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능선이 마치 부처가 누워 있는 모습처럼 보인다. 두타산 정상에는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성이 있는데 길이 1㎞, 높이 1.2m 규모로 성내에는 두 개의 우물터가 있으며, 이따금 통일신라시대의 토기 조각과 기와 조각, 고려시대의 유물이 발견된다.
전설에 따르면 단군이 팽우에게 산천을 다스리게 했는데, 그때 하루도 빠짐없이 비가 내려 온 산천이 모두 물에 잠기게 되자 사람들이 높은 곳으로 피난을 가야 했다. 이때 팽우도 이곳으로 피해 머물렀는데, 모두 물에 잠기고 산꼭대기가 섬처럼 조금 남아 있었다고 하여 두타산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두타산에 오르는 길은 진천 쪽 초평저수지에서 영수사를 거쳐 오르는 길과 대평주유소 전 동잠교에서 계곡을 따라 큰재로 올라 북동쪽 능선을 타고 정상에 오르는 길이 자주 이용된다. 증평읍 자양마을에서 오르는 길이 있지만 접근이 어렵고 능선을 넘어 다시 계곡으로 떨어져야 하므로 거의 이용되지 않는다.
정상에 오르면 서쪽으로는 진천군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동쪽으로 돌아서면 증평군 지역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보인다. 남쪽으로는 유유히 흐르는 미호천(美湖川) 너머로 청주시와 상당산성이 아득하게 조망된다.
[두타산 영수사의 저녁 종소리]
영수사를 품어 안은 두타산은 그리 큰 산은 아니지만 막상 산으로 들어서면 의외로 골이 깊어서 골짜기로 난 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야 절 입구에 다다른다. 주위의 풍치도 고즈넉하면서도 수려하여 옛날의 시인 묵객은 ‘두타모종(頭陀暮鍾)’, 곧 두타산에서 울려 퍼지는 영수사의 저녁 종소리를 상산팔경(常山八景)의 하나로 꼽았다. 상산은 진천의 별칭이다.
영수사는 918년(태조 1) 증통국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나 확실한 문헌 기록이 없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도 절 이름이 나타나 있지 않다. 다만 1871년에 간행된 『호서읍지』에 처음으로 기록이 나타나는데 간단히 위치만 소개되어 있다.
1937년 간행된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는 “영수사는 두타산에 있는데 절 뒤에 영천(靈泉)이 있으므로 절 이름을 영수사라 하였으며 삼한 고찰(古刹)이라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상산지(常山誌)』에도 이와 같은 기록이 보인다.
절에 전해 오는 중수기에 따르면 1624년(인조 2) 벽암대사가 중건했고, 1831년(순조 31) 승려 묘익이 지방민과 힘을 모아 절을 중수하였으며, 1866년(고종 3) 이한이 다시 수축하였다고 한다. 이후 여러 차례의 중건을 거치면서 근근이 유지되어 오던 조그마한 암자였으나 30여 년 전 혜철화상이 중창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재 경내에는 조선 후기에 지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집인 관음보전, 목조관음보살좌상, 「진천 영수사 영산회괘불탱」, 조선 말기에 그려진 후불탱화와 칠성탱화 등이 있고, 그 밖에 근래에 신축한 앞면 3칸 옆면 3칸의 대웅전, 대웅전 앞마당 좌우에 콘크리트조의 관음보전과 승방 건물이 있다.
「진천 영수사 영산회괘불탱」은 초파일이나 특별한 법회가 있을 때 간혹 밖에 내걸어 많은 사람이 예불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림이 워낙 크다 보니 밖에 내걸기가 쉽지 않은 데다 날씨가 흐리거나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에는 걸지 못한다.
기후 조건까지 잘 맞는 아주 특별한 날에만 걸리는 괘불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복이 아닐까 한다. 상산팔경의 하나인 영수사의 종소리는 매일 새벽과 저녁나절에 두타산을 감싸며 은은하게 울려 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