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5002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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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得洙 |
영어음역 | Kim Deuksu |
이칭/별칭 | 김영수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 성내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윤선 |
성격 | 판소리 고수|민속예술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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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 성내리 |
성별 | 남 |
생년 | 1917년 |
몰년 | 1990년 |
초명 | 영수(永洙) |
대표경력 |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판소리 고법] 기·예능보유자 |
[정의]
전라남도 진도군 출신의 민속예술인.
[개설]
김득수는 전라남도 진도읍 성내리 출신으로 본명은 김영수(金永洙)이다. 본래 판소리를 전공하였으나 후에 고수의 길로 들어서 손꼽히는 명고수가 되었고, 1986년 판소리 고법으로 국가무형문화재 제59호로 지정되었다.
아버지는 「진도 북춤」의 중시조로 알려진 김행원이다. 김행원은 흔히 ‘오바’라는 별칭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김득수의 조카인 박진섭 또한 판소리에 천부적인 소질을 지닌 사람이었으나 현재는 진도에서 씻김굿 악사로 활동하고 있다.
[활동사항]
김득수는 어려서 채두인에게 잡가와 판소리를 배웠고, 오수암에게 판소리를 배워 판소리 명창으로 이름을 떨쳤다. 협률사 공연에도 참여하였으며, 이후 조선성악연구회에 들어간다. 이후 진도에서 판소리 명창으로 촉망받게 되는 허희(許爔) 같은 이에게 판소리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김득수는 1934년부터 동일창극단 단원으로 활동하는 등 일찍부터 전국적인 활동을 개시하였다. 1948년 이후에는 박동실을 중심으로 꾸려진 ‘국극협회’에서 김소희, 한일섭 등과 호흡을 맞추었다. ‘국극협회’가 적자운영으로 광주의 박후성을 중심으로 ‘국극협단’으로 이름을 바꾸어 문을 열자, 다시 양상식·오정숙 등과 합류하여 호흡을 맞추었다.
1956년 예술원국극단을 창단하여 활동하다가, 1964년부터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악장으로 활동하였다. 1970년에는 한국국악협회 부이사장으로 활동하였다.
이외에도 조선창극단 단원, 국극협회 단원, 국악사 단원, 우리국악단 단원 등 다방면으로 활동하였으며, 1990년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의의와 평가]
김득수는 고법문화재로 활동한 전국적인 인물이자 창극 초창기 한국의 대표적 창자들과 동거동락한 공로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진도 내에서 도제식 교육으로 다수의 제자들을 양육시켰다는 점에 더 많은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양성한 이들 중에서 판소리로 대성한 사람들은 없지만, 진도 내에서 판소리와 민속음악의 지평을 넓히는 데 크게 공헌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