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5005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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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鍾殖 |
영어음역 | Park Jongsik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남도 진도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박주언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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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 박원배 |
어머니 | 곽동순 |
아우 | 박종극 |
아내 | 조순덕 |
출신지 | 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지막리 |
성별 | 남 |
생년 | 1910년 |
몰년 | 1948년 |
본관 | 밀양 |
상훈 | 건국포장 |
제향 | 송학사 |
[정의]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개설]
박종식은 1910년 12월 20일 진도군 고군면 지막리에서 박원배(朴元培)와 곽동순의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인 창녕조씨 조순덕과의 사이에서 박창원(재미실업가), 박경원, 박지원(전 청와대 대변인, 김대중 대통령 비서실장) 등 3남 1녀를 두었다. 1948년 향년 39세로 세상을 떠났다.
[활동사항]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으로 시작된 목포학생운동은 목포상업학교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당시 목포상업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종식은 광주 학생들과 연계해 목포 시내 각 학교에 진정서를 보내 동맹 휴교를 합의했다.
10개 항으로 된 유인물 1,500장과 태극기 120매를 제작하여 학생들에게 배포하였다. 박종식은 1929년 11월 16일과 17일 양 일에 걸쳐 활동하다가 현장에서 체포되어 목포형무소에 구금되었다가 광주지방법원 형사부로 넘겨졌다.
1930년 3월 4일자『동아일보』에는 박종식이 출판법 위반, 시위 주동, 보안법 위반, 전신법 위반 등으로 재판을 받은 사실이 보도되었다. 당시 신문은 목포상업학교 학생 18명에 대한 공판 기록을 실었다. 목포상업학교 학생으로 박종식과 함께 거사에 함께 했던 진도 출신 학생으로는 진도읍의 이광우, 임회면 매정리의 이재실, 조도면 창유리의 박사배 등이었다.
재판 후 박종식은 광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감하여 진도에 돌아와서는 일제하에서의 공직을 거부하고 진도 군민들을 지키는데 앞장섰다. 해방 직전 큰 흉년이 들었을 때 일제가 군량미 조달을 위해 진도의 쌀을 거두어 벌포리 해변에 야적하고 선적을 기다리고 있었다. 박종식은 진도군 고군면 유지 박종회와 상의해 우리 백성이 굶어 죽을 판인데 일본 놈들에게 빼앗길 수 없다면서 땅을 파고 숨기게 했다가 나중에 파내어 진도 군민들에게 돌아가게 했다.
해방 후에는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남북한 통일정부를 주장하였다. 박종식은 체격이 좋고 힘이 강해 씨름판에서 심판을 보는 일이 많았다 한다.
[묘소]
묘소는 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도적골 산마루에 있다.
[상훈과 추모]
송학사(松鶴祠)에 배향되었고, 건국포장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