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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500657
한자 烽燧
영어음역 bongsu
영어의미역 beacon fires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남도 진도군
집필자 정명철

[정의]

높은 산정에 봉화대를 설치하고 밤에는 횃불, 낮에는 연기로 변경의 정세를 중앙에 급히 전달하는 군사·통신시설.

[개설]

진도에는 6개소의 봉수 유적이 남아 있다. 우선 첨찰산 봉수는 진도에서 가장 높은 해발 460m의 첨찰산 봉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여귀산 봉수는 진도 남부에서 가장 높은 해발 457m의 여귀산 봉우리에 위치한다. 상당곶 봉수는 여귀산 남쪽 해발 204m의 오봉산 봉우리에 위치한다. 서쪽으로는 굴포봉수와 남도포진이, 동쪽으로는 금갑진과 사구미봉수가 자리 잡고 있으나 여귀산 봉수가 가장 잘 관찰된다. 『여지도서(輿地圖書)』 및 『대동지지(大東地志)』 등에 따르면, 오봉산 남쪽 30리에 있는 것으로 밝히고 있다.

굴포 봉수는 임회면 굴포리 신동마을 북동쪽 해발 149m의 연대산 봉우리에 위치한다. 남쪽 해안과 북동쪽의 여귀산 봉수가 잘 관찰된다. 『여지도서』『진도부읍지』 등에는 연대산 남쪽 30리에, 『대동지지』에는 남도포진 남쪽 5리에 있다고 밝히고 있다. 사구미 봉수는 의신면 금갑리 진도 금갑진성 서쪽의 해발 85m의 연대봉 봉우리에 있다. 동쪽으로는 금갑진성이, 서쪽으로는 여귀산 봉수가 각각 바라다 보인다. 돈대봉 봉수는 조도면 창유리 남서쪽 해발 231m의 돈대봉 제2봉우리에 위치한다. 돈대봉 봉수 동서쪽에는 상조도 성재산성이 있고, 북쪽에는 대봉산 봉수가 위치하며, 북동쪽으로는 신금산 봉수가 잘 바라다 보인다. 신금산 봉수는 『남도포진지』에 “하조도는 관문으로부터 수로로 30리에 있다. 돈대는 1개소인데 나리산에 있고, 영장 1명과 군사 137명…”이라고 밝혀져 있는 것이 전부이다.

[변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비롯한 여러 지리지에 의하면 첨찰산 봉수는 동쪽의 해남 관두산 봉수, 남쪽으로는 여귀산 봉수에서 연락을 받아 북쪽의 해남 일성산 봉수에 전달하는 연변봉수였다.『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제5거 직봉이었다고 나와 있다. 여귀산 봉수는『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여러 지리지에 의하면 동쪽의 해남 관두산 봉수에서 연락을 받아 북쪽의 첨찰산에 전달하는 연변봉수였다.『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금갑진에 속한 제5거 직봉이었다.

[시설]

첨찰산 봉수는 자연 암반 위에 둘레 30m, 지름 9m, 높이 2m 정도의 둥근 모양으로 연대를 조성하였다. 한편 여귀산 봉수는 자연 암벽으로 이루어진 정상부에 지름 6m, 높이 4.5m의 둥근 모양으로 연대를 조성하였다. 연대는 갈라진 암벽의 사이만 보완하여 자연지형을 잘 이용하고 있다. 보조 연대로는 상당곶 봉수, 굴포 봉수, 사구미 봉수 등 3개소를 두었다.

상당곶 봉수는 경사가 심한 암반 위에 지름 9m, 높이 3.5m의 둥근 모양으로 조성하였다.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상당곶 봉수는 여귀산의 보조연대였다고 한다. 따라서 굴포 봉수는 여귀산 봉수의 보조연대로서 남도포진에 소속된 봉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구미 봉수는 규모는 지름 10m, 높이 1m 내외로 몇 단의 석축만이 남아 있다. 사구미 봉수는 여귀산 봉수의 보조연대로서 금갑진에 소속되어 있었다. 돈대봉 봉수는 돈대산이 암벽으로 된 험한 산이라 봉홧불을 피우던 봉대 역시 암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연대는 상단과 하단 두 단으로 되어 있으며, 돌을 쌓아 둥근 모양으로 조성하였다. 상단부의 지름은 약 7m, 높이 2.8m이며 하단부의 지름은 5m, 높이 3.2m이다.

[현황]

첨찰산 봉수는 현재 대부분 무너져 있으며 높은 산봉우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물이 풍부한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다. 여귀산 봉수에서는 진도 남쪽 해안의 거의 모든 지역이 관찰될 뿐만 아니라 남쪽의 상당곶 봉수와 남동쪽의 굴포 봉수가 한눈에 들어온다. 동쪽으로는 금갑진과 사구미 봉수가, 남동쪽으로는 남도포진성이 위치하고 있다. 굴포 봉수는 자연 암반 위에 지름 7m 정도의 둥근 모양으로 조성하였는데 무너진 석재만이 확인된다. 사구미 봉수의 연대는 자연 암반 위에 둥근 모양으로 조성하였는데 이미 조선 후기에 무너져 있어 흔적만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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