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5009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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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梁漢奎 |
영어음역 | Yang Hangyu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남도 진도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정호 |
[정의]
조선 말기의 의병장.
[가계]
본관은 남원(南原). 초명은 월서(月瑞), 자는 문찬(文贊), 호는 칙헌(則軒)·초계[初桂, 草溪]. 전라북도 남원 출신으로 증호조판서 양맹석(梁孟錫)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파평윤씨이다.
[생애]
1844년(헌종 10)에 태어났다. 임오군란시 의병을 일으켰으며, 선략장군 부사과(宣略將軍副司果), 통훈대부초계군사 겸내금위장(通訓大夫草溪郡事兼內禁衛將)에 제수되고 이어 통정대부가 가자되었다. 1907년 남원에서 전사하였다.
[활동사항]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남원부사 심의두(沈宜斗)에게 청하여 군사 300명을 거느리고 상경하여 난군을 토벌하고자 하였으나, 심의두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국권을 회복하고자 널리 우국지사와 연락하여 군사를 모았는데, 영남과 호남에서 1,000여 명이 호응하였다. 1907년 2월 12일 남원 진위대 성내 장병이 연말연시를 맞아 휴가를 나간 틈을 이용하여 읍을 점령, 무기를 접수할 계획을 세웠다.
그의 휘하 100여 명의 정예병을 비롯, 참봉 유병두(柳秉斗)의 군사 50명 및 진사 박재홍(朴在洪), 상인 양문순(梁文淳) 등 많은 의병에 의하여 의병대장으로 추대된 뒤 13일 새벽 읍내로 진군, 남원성에 입성하였다.
고광순(高光洵) 부대와 합류하여 광한루에 본진을 두고 있던 일본군과 진위대를 급습하자 모두 성 밖으로 도주하여 무기·군수품을 그대로 접수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1907년 일본군에 붙잡혀 7월 12일 18명의 동지들과 함께 진도에 유배되었다.
[상훈과 추모]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