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5010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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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遠浦-洞祭 |
영어음역 | Wonpo Maeul Dongje |
영어의미역 | Wonpo Village Tutelary Festival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의례/제 |
지역 | 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원포리 |
집필자 | 나경수 |
[정의]
진도군 고군면 원포리 원포마을에서 매년 지내고 있는 마을제사.
[개설]
바닷가 마을인 원포마을은 며흘포, 마흘포가 ‘멀포’로 변하여 의역된 것이다. 지금은 원포라는 이름으로 고정되었는데, ‘멀고 험하고 외진 곳’이란 뜻이다. 주민들의 주요 소득원은 쌀, 김, 전복이다.
현재 주요 성씨는 김해김씨와 나주임씨이다. 마을 공동재산으로 마을회관이 있고, 마을조직으로는 13명으로 구성된 청년회, 15명으로 구성된 어촌계, 20명으로 구성된 부녀회, 40명으로 구성된 노인회가 있다. 마을 내 유물유적으로 당제 사당 1개소가 있다.
주민이 많이 살 때는 50호 이상이었으나 현재는 40호 정도가 산다. 특히 이 마을은 6·25전쟁 때 크게 피해를 보았다. 좌우 양쪽에서 약 70여 명이 죽임을 당했다. 마을에서는 양뺨을 맞았다고 하며, 다른 마을들에서는 이 마을을 모스코바라고 부를 정도였다고 한다.
원포마을에서는 매년 섣달 그믐날 밤에 바닷가에서 거리제를 모시고, 정월 초하루부터 시작하여 초사흘까지 당집에서 당제를 모신다. 섣달 그믐날 아침에 제관을 뽑아서 거리제와 당제를 모시게 한다.
[연원]
거리제를 모시는 방식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거의 흡사하다. 그러나 당제의 경우는 많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당집 옆에 당집을 지키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마을 소유로 되어 있는 논과 산, 그리고 당집 옆에 3칸 살림집이 있었다.
그 집에 살던 사람이 매년 제물을 장만하여, 제관으로 뽑힌 사람들을 도와 당제를 모셨다. 그러나 수십 년 전에 집도 없어지고 토지도 팔아버렸다. 그래서 지금은 이장 집에서 제물을 장만한다.
또 마을 동남쪽에 있는 산을 당산이라고 부르는데, 그 산모롱이에 당신을 모시는 곳이 따로 있었다. 바닷가에서 조금 올라가면 대나무 숲이 우거진 깊숙한 곳에 예전부터 전해오는 당신을 모시는 곳이 있었던 것이다. 산 속을 굴처럼 파낸 뒤 내부에는 넓적한 돌로 벽을 만들고, 앞쪽은 기왓장들로 가려 비가 스미지 않도록 해둔 곳이었다.
그 속에 한 뼘 정도 되는 대나무로 만든 위패 3개가 놓여 있었다. 초하룻날 이 위패들을 공손히 모시고 당집에 옮겨다가 안치하고 초사흘까지 치성을 드린 후에 다시 그곳으로 옮겨놓았다. 대나무가 썩으면 다른 대나무를 베어 새로 마련했다.
아주 오래된 옛날 마을에 세 구의 시신이 떠내려 왔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그들을 지금 당산이라고 부르는 곳에 묻어주었다. 그 뒤 세월이 오래 흐른 후에 그들을 묻었던 곳에 위패 모시는 장소를 만들었으며, 그 세 사람들을 모시게 된 것이 당제의 유래라고 한다. 그러나 20여 년 전부터는 위패를 모셔오는 일을 중단했다.
위패에는 두 종류가 있었다. 앞에서 말한 옮겨오는 위패와 당집에 항상 보관하는 위패가 그것이다. 그러나 위패라고는 하지만 아무런 글씨도 새겨져 있지 않다. 옮겨오는 위패보다는 당집에 보관하는 위패가 훨씬 크고 굵었다. 위패는 매년 당제를 모실 때 옷을 입힌다고 하여 한지로 한 번을 두른다.
이렇게 오랫동안 한지로 위패를 싸매어 매우 굵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해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당집에 불이 나버렸다. 그래서 이들 위패가 불에 타 없어졌다. 만약 그것들이 남아 있어 한지를 벗겨보았다면 몇 년이나 지난 것인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신당/신체의 형태]
현재의 당집은 두 칸 집이며, 한 칸은 제실이고, 다른 한 칸은 농악기 등을 보관한다. 예전에는 초가집이었으나 지금은 슬레이트 지붕이다.
당집을 지키며 사는 사람을 마을에서는 당조라고 하였으며, 아이들은 당할아버지, 또는 당조할아버지라 불렀다. 당할아버지가 있을 때는 마을의 대소사에 뒷심부름을 해주는 일까지 맡았다. 예를 들면 동제를 치를 때 마을사람들을 회관에 모이도록 부르러 다니는 일 등도 했다.
당조할아버지는 거리제와 당제를 모실 때도 제물을 장만하지만, 매달 초하루와 보름날 나물 세 가지와 메를 짓고 탕을 끓여 당집에 올리는 일까지 하였다. 거리제와 동제, 그리고 초하루와 보름에 제상을 차리는 데 필요한 일체의 비용은 본인이 부담한다.
[제관의 선정 및 역할]
그믐날 아침에 마을회의를 해서 제관을 뽑는다. 예전에는 두 사람을 뽑았으나 요즈음은 한 사람만 뽑는다. 대체로 제사를 모시는 일이 간편해졌기 때문이다. 제관은 마을에서 나이가 좀 지긋한 분 중에서 집안에 유고가 없는 남자로 고른다. 여자는 안 된다.
예전에 당조집이 따로 있었을 때는 제관으로 뽑힌 사람은 섣달 그믐날 거리제를 모시고 당집에 오르면 거기에서 마을로 돌아오지 못하고 초사흘까지 지내게 되었다. 당지기의 집이 세 칸 집인데 방 한 칸을 비워 제관들이 머물도록 했다. 제관들은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사흘간 거기에서 매일 목욕을 하고 식사도 하였다. 제관으로 뽑히면 차례도 못 모시고, 성묘도 가지 못한다.
지금은 당지기의 집이 없기 때문에 제관 자신의 집에 머물러 있다가 제상을 차리고 절을 하는 시간에 맞추어서 당집에 올라간다.
지금은 일체의 제물은 이장 댁에서 장만을 한다. 또 제사 비용 역시 마을 자금에서 지불한다. 그 해 제관으로 뽑힌 사람에게 수고비로 10만 원을 주고, 제물을 사는 등 제사 비용으로 10만 원 정도가 소요된다고 한다.
이장은 제관과 더불어 제물을 장에서 사온다. 제물 중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돼지머리이다. 생선은 전혀 쓰지 않는다. 돼지머리를 하나 사서 삶아두었다가 당제를 모실 때 고기를 썰어 제상에 올린다. 마을의 제기도 있지만, 요즈음은 부녀회의 그릇이 깨끗하기 때문에 제사를 모시면서 빌려 쓴다.
[절차]
섣달 그믐날 오후 6시 반쯤에 굿을 칠 사람들은 당집에 모이라는 방송을 한다. 이 마을에서는 4년 전까지 당제를 모시면 집집이 돌면서 마당밟이를 하여 마을 자금을 모아왔지만, 여자들이 꺼리는 것 같아 지금은 모으지 않는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 각 가정을 돌며 굿을 쳐주는 것을 금고(金鼓), 걸궁, 지신밟이, 마당밟이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부르고 있는데, 마당밟이를 할 때는 거리제나 당제에 굿물을 치는 사람들이 함께 참여를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제관들만 참여하여 제사를 모신다.
예전에는 거의 매년 굿을 쳤기 때문에 오후 시간에 맞춰 당집에 모여 각자 맡은 농악기를 챙겨 굿을 치게 된다. 예전에 당지기가 있을 때는 당지기의 집에서 제물을 장만하기 때문에 거기에서 제물을 거리제를 모시는 곳까지 옮겨왔다. 지금은 이장집에서 내어온다. 당집에서 제물을 옮길 때 굿을 치는 사람들이 함께 굿을 치면서 제관들과 함께 거리제를 모실 장소로 이동을 한다.
거리제는 두 곳에서 모신다. 현재 마을의 승강장으로 쓰고 있는 바닷가 넓은 공터와 마을에서 동남쪽으로 산모롱이가 있는데, 그 부근에 고목이 우거진 바닷가가 다른 한 곳이다. 섣달 그믐날 오후 7시경에 제물을 옮겨와서 먼저 마을 앞 공터에 제상을 차리고 거리제를 모신다.
제상에 올리는 제수는 메와 탕 3그릇, 나물 3종류, 돼지고기 3접시, 떡 3시리 등이며, 술잔도 3잔을 준비한다. 진설이 끝나면 술잔을 올리고, 재배를 하며, 재배가 끝나면 제관이 마을에 사고도 없고 해산물도 잘 되게 해달라고 소리는 내어 빈다. 축문은 없다. 이것이 끝나면 철상을 하고, 다시 고목 아래로 가서 똑같은 방법으로 거리제를 올린다. 거리제가 끝나면 대개 오후 9시경이 된다.
지금은 제관이 바로 본인의 집으로 돌아가서 자고, 다음날 아침 제물을 가지고 당집에 올라가서 진설을 하고 아침에 제사를 모신다. 그러나 예전에 당지기가 있을 때는 거리제를 마치고 나면 두 명의 제관들은 당지기와 함께 당지기의 집으로 바로 올라가서 3일 동안 머무르면서 제사를 모셨다.
예전에는 정월 초하루 아침에 제상을 차리고 제사를 마치면 좀 쉬었다가 제관들은 당산으로 위패를 모시러 갔다. 이때 굿을 치는 사람들이 영기를 앞세우고 굿을 치면서 함께 간다. 당산에 가면 기왓장을 치우고 대나무로 만들어진 위패 3개를 들고 조심스럽게 당집으로 모셔온다. 이미 당집 안에도 그보다 큰 위패 세 개가 있어서 각기 그 앞에 당산에서 가져온 위패를 놓는다.
매번 제상을 차리고 나면 술잔을 올리고 절을 한다. 절이 끝나면 엎드려서 마을사람들이 기대하는 소망을 큰 소리로 빈다. 주로 사고가 나지 않게 해주고 농사나 해산물이 잘 되게 해달라고 빈다.
만일 마당밟이를 하는 때 같으면 굿을 치던 사람들이 메를 올리는 시간에 맞춰 매번 당집에 올라간다. 메를 올리고 제사를 모실 때 당집 밖에서 당굿을 친다. 당집 옆에는 자그마한 바위가 놓여 있는데, 매번 제사를 모시고 나면 제상에서 음식을 조금씩 걷어서 이곳에 붓는다. 이는 헌식으로 이곳에서는 ‘퇴고시라’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초사흘 낮 제사를 끝내면 다시 제관들과 굿을 치는 사람들은 제물을 갖추어 당산으로 간다. 위패를 원래 있던 곳에 놓아두고 앞에 한지를 깔아 간단한 제상을 마련한다. 제주를 한 잔 올리고 절을 하고 나서 앞을 가린다. 이렇게 하고 나면 3일 치성이 끝나고 당제를 마치게 된다.
원포마을에는 여러 가지 당제와 관련된 영험담이 전한다. 10여 년 전에 마을에서는 회의를 통해 당제를 폐지했다. 그러자 마을에서 전혀 예상치도 않던 초상이 자주 났다. 그러자 사람들이 놀라서 다시 당제를 모시기 시작했다.
또 한 번은 마을 총회가 열린 자리에서 최도식(가명)이라는 사람이 미신이라며 당집을 불을 살라버리자고 했다. 그 다음날 바람도 없었는데, 그 사람이 하는 김발만 터져서 망해버렸다고 한다.
또한 당산에는 대나무가 우거져 있는데, 예전에는 그곳에서 대나무를 베어 쓰지 못했다. 만약 대나무를 베면 신이 넘어뜨려 죽여버릴 것이라고 믿었다. 또 일제시대 때에는 개고기를 먹은 사람이 당집에 갔다가 현장에서 즉사를 했다는 말도 전해지고 있다.
[제물/용품/제구]
당집 안에 차리는 제상은 초하루 첫날은 아침, 점심, 저녁을 모두 올린다. 둘째날은 아침과 저녁만 올리고, 점심에는 제주만 한 잔 올린다. 그리고 마지막 사흘째 되는 날은 아침과 점심만 올린다. 제상에는 매번 메와 탕 3그릇, 나물 3종류, 돼지머리고기 3접시, 그리고 술잔 세 개를 올린다. 돼지머리고기는 한 그릇에 3점씩 큼지막하게 잘라 담는다. 한 번 올릴 때마다 그래서 9점의 머리고기가 필요하다.
[부대행사]
원포마을에서는 매년 양력 12월 26일을 동제 날짜로 잡아두었다. 요즈음은 행정적으로 양력을 위주로 하기 때문에 날짜를 고정했다고 한다. 동제를 하면서 당제와 관련된 비용 등에 대한 결산과 보고를 하게 된다.
요즈음은 뜸해졌지만, 당제를 모실 때는 거의 걸궁을 쳤다. 그러면 며칠간 각 가정을 돌면서 굿을 쳐주고 마을 자금도 모았지만 요즈음을 잘 하지 않는다.
[금기]
집안에 상을 당한 사람이나 아이를 낳은 집안의 사람, 그리고 정월에 아이를 낳을 집의 사람도 제관이 될 수 없다. 특히 개고기를 먹은 사람은 절대로 안 된다고 한다.
제관은 제사를 모시기 전에 몸가짐을 바로 하고, 부부생활을 해서는 안 되며, 궂은 곳에 가지도 않고, 특히 집안에 유고가 있는 사람과 만나지도 말아야 한다. 그믐날 다른 사람의 출입을 금하기 위해서 제관집에 왼새끼를 꼬아 금줄을 친다.
[현황]
원포마을 사람들은 마을이나 주민에게 피해가 생길까 봐 당제를 모시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덕을 보는지는 몰라도 피해를 보는지는 금방 안다고 한다. 10여 년 전에 당제를 폐지했다가 마을에서 여러 사람이 죽어나가던 일이 있었기 때문인지 당제를 폐지하자는 의견이 요즈음은 나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