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501148 |
---|---|
한자 | 李繼孟 |
영어음역 | Yi Gyemaeng |
이칭/별칭 | 희순,묵곡,묵암,문평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남도 진도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정호 |
[정의]
조선 중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희순(希醇), 호는 묵곡(墨谷)·묵암(墨巖). 태사(太師) 이도(李棹)의 후손이며, 부여감무 이의(李宜)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현감 이대종(李大種)이고, 아버지는 이영(李潁)이며, 어머니는 생원 채소명(蔡紹明)의 딸이다.
[생애]
1458년(세조 4)에 태어났다. 문과 급제 후 검교, 정언, 좌승지, 전라도관찰사, 좌부승지, 경기도관찰사, 판서를 두루 지낸 뒤 기묘사화 뒤 물러났다. 1523년(중종 18)에 사망하였다. 성품이 강직해 옳고 그름에 명백한 태도를 취했고 군자다운 태도가 있었다 한다.
[활동사항]
1483년(성종 14) 진사·생원시에 합격했으며, 1489년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해 설서·검교·정언·집의·좌승지 등을 지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라는 죄목으로 영광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조사결과 김종직이 전라도관찰사로 있을 때 유생을 모아 치른 시험에서 성적이 뛰어나 종이와 붓을 받았을 뿐 사제 관계는 아님이 판명되어 석방되었다.
오랫동안 야인으로 지내다가 1503년 장령이 되었고, 전한을 거쳐 좌부승지가 되었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대사헌으로 승진했으나 이듬해 박경(朴耕)의 옥사로 진도에 유배되었다. 곧 억울하게 연루되었음이 밝혀져 풀려나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509년 경기도 관찰사에 임명되고 이듬해 성절사로 중국에 다녀온 뒤 평안도관찰사를 비롯해 호조·형조·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517년 주청사(奏請使)로 중국에 가서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이성계(李成桂)가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잘못 기록된 것을 발견하고 보고하였다. 이어 좌찬성·병조판서 겸 지경연사(兵曹判書兼知經筵事)를 거쳤다.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사류(士類)들에 대한 처리가 지나치자, 스스로 논의에 맞지 않다고 여겨 김제(金堤)에 있는 농막으로 퇴거하였다.
[상훈과 추모]
전주의 서산사우(西山祠宇)와 김제시 교동의 용암서원(龍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평(文平)이다.
전라북도 김제시 제월동 재궁마을에는 이계맹(李繼孟)이 1484년(성종 15)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고 148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른 후 광국공신(匡國功臣)이 되자 종중이 하사한 재궁리석등(齋宮里石燈)[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78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