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5013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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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聖復 |
영어음역 | Jo Seongbok |
이칭/별칭 | 사극(士克),퇴수재(退修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남도 진도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정호 |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사극(士克), 호는 퇴수재(退修齋). 조박(趙璞)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견소(趙見素)이고, 아버지는 감역 조시채(趙始采)이다. 어머니는 최득일(崔得一)의 딸이다. 아내는 변세구(邊世耉)의 딸이다. 형으로 조성집(趙聖集)이 있다.
[생애]
1681년(숙종 7) 태어났다. 문과 급제 후 지평, 정언, 장령, 헌납 등을 지내다 1723(경종 3) 사망했다.
[활동사항]
1702년(숙종 28)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지평·정언을 지냈다. 1716년 지평으로 있으면서 윤선거(尹宣擧)의 선정(先正) 칭호를 금할 것을 청하였고, 이후 장령·헌납을 지내다가 1721년(경종 1) 집의로서 양역(良役)의 폐단을 논하는 소를 올렸다.
같은 해 헌납이 되어 윤선거의 유집(遺集)에 잘못된 문자가 있으니 훼판할 것을 청하였다. 그 해에 다시 집의가 되어 경종에게 세제(世弟 : 영조)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요구하는 소를 올려 노론의 지지 속에서 받아들여졌으나, 소론측이 무군부도(無君不道)의 죄로 몰아 의금부에서 배후를 캐는 국문을 받고 1721년 10월 12일 진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이후 정의(旌義)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이 대리청정 문제는 신임사화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1723년 다시 잡히게 되자 옥중에서 음독자살하였다.
[상훈과 추모]
영조 즉위 후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의의와 평가]
신임사화 때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