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5017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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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壽恒 |
영어음역 | Kim Suha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남도 진도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정호 |
[정의]
조선 중·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구지(久之), 호는 문곡(文谷). 증조부는 김극효(金克孝)이고, 조부는 김상헌(金尙憲)이고,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김광찬(金光燦)이다. 어머니는 목사 김사(金瀉)의 딸이다. 형은 김수흥(金壽興)이고, 아들은 김창집(金昌集)·김창협(金昌協)이며, 손자는 김제겸(金濟謙)이다.
[생애]
1629년(인조 7)에 태어났다. 1651년(효종 2)에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전적(典籍)에 임용되었다. 이후 병조좌랑·사서(司書)·경기도사·지평(持平)·정언(正言)을 거쳐, 1653년(효종 4)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55년(효종 5) 호당(湖堂)에 사가독서하고 수찬이 되었다가, 응교(應敎)·사간·보덕(輔德)을 지냈으며, 중시에서 을과로 급제, 형조참의·승지·부제학을 지냈다. 1672년(현종 13) 44세의 나이로 우의정에 발탁되고, 좌의정에 승진해 세자부(世子傅)를 겸하였다. 그러나 숙종대에 들어 남인과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유배와 좌천, 복귀를 거듭하다가 진도로 유배되어 1689년(숙종 15) 사사되었다.
[활동사항]
김수항의 활동은 조선 후기 당쟁 전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1674년(현종 15) 갑인예송에서 서인이 패해 영의정이던 형 김수흥이 쫓겨나자 대신 좌의정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숙종 즉위 후 허적·윤휴(尹鑴)를 배척하고 추문을 들어 종실 복창군 정(福昌君楨)·복선군 남(福善君枏) 형제의 처벌을 주장하다가 남인의 미움을 받아 영암에 유배되고 1678년(숙종 4) 철원으로 이배되었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이 일어나 남인들이 실각하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복귀, 영의정이 되어 남인의 옥사를 주도하고 송시열·박세채(朴世采) 등을 불러들였다. 그러나 1689년 태조어용(太祖御容 : 태조의 영정)을 전주에 모셔놓고 돌아오는 길에 기사환국이 일어나 남인이 재집권하자, 남인의 명사를 함부로 죽였다고 장령(掌令) 김방걸(金邦杰) 등의 탄핵을 받아 진도로 유배, 위리안치되었다.
뒤이어 예조판서 민암(閔黯)을 비롯한 육판서·참판·참의 등 수십 인의 남인들의 공격과 사헌부·사간원의 합계(合啓)로 사사되었다. 경신대출척 이후의 남인 옥사를 다스릴 때 위관으로 있었고 특히 소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인 재상 오시수(吳始壽)를 처형했기 때문에 입게 된 보복이었다.
김수항은 진도로 유배된 바로 그 해에 사사되었다. 진도로 따라온 아들 김창협(金昌協)은 김수항이 진도에서 사사되자, 봉구(奉柩) 치장(治葬)한 후 모부인을 모시고 영평에 은거하여 두문불출하였다.
[학문과 사상]
절의로 이름 높던 김상헌의 손자로 가학(家學)을 계승했으며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인 송시열·송준길(宋浚吉)과 종유하였다. 특히 송시열이 가장 아끼던 후배로서 한 때 사림의 종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될 때 송시열을 옹호하고 외척과 가까운 노론의 영수가 되자, 소론 명류들에게 배척을 받기도 하였다. 시문에 뛰어났고, 변려문(騈儷文)에서는 당대의 제일인자로 손꼽혔다. 또한 가풍을 이은 필법이 단아해 전서와 해서·초서에 모두 능하였다.
[저술]
저서로는『문곡집(文谷集)』28권이 전하고 있다. 윤광계(尹光啓)의 시문집 『귤옥졸고(橘屋拙稿)』의 서문을 썼다.
[상훈과 추모]
1694년(숙종 20)에 신원·복관되었고, 1886년(고종 23)에는 현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진도의 봉암사(鳳巖祠), 영암의 녹동서원(鹿洞書院), 영평의 옥병서원(玉屛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또한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전주의 호산사(湖山祠)에 추가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