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5017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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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履翼 |
영어음역 | Kim Iik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남도 진도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정호 |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보숙(輔叔), 호는 유와(牖窩). 증조부 김창업(金昌業)은 진도에 유배와서 사사당한 김수항(金壽恒)의 넷째 아들이고, 할아버지는 김우겸(金祐謙)이다. 아버지는 김유행(金由行)이며 어머니는 이덕영(李德英)의 딸이다. 형제는 형으로 김이흥(金履興)·김이인(金履寅)이 있고, 서제로 김이진(金履眞)이 있다. 자식으로는 김철순(金徹淳)·김휘순(金徽淳)·김우순(金禹淳)이 있다.
[생애]
1743년(영조 19)에 태어났다. 1785년(정조 9)에 진사로 시작하여 교리, 이조참의, 대사성, 대사간, 안동부사, 강화유수, 강원도 관찰사, 공조판서, 병조판서, 대호군 등을 역임하였다. 1812년(순조 12) 은퇴하여 1830년(순조 30) 9월 27일에 향년 88세로 세상을 떠났다.
[활동사항]
1787년(정조 11)에 부교리에 재직하고 있을 때 함경도 경원에 익조(翼祖)와 도조(度祖)를 기리는 비를 세울 것을 건의하여 받아들여졌다. 다음해 교리가 되어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을 탄핵하다가 1788년(정조 12) 이성에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 장령(掌令), 동부승지, 대사성, 대사간 등을 거쳐 1793년(정조 17)에 안동부사가 되었다.
안동부사 재직 시 형벌이 과다하다는 안동 사람들의 소청에 따라 유배되었다. 이듬해 이조참의와 대사간을 지내고 1795년 강화유수를 역임하였다. 1800년 순조가 즉위한 뒤 벽파가 득세하자 시파로 지목되어 대왕대비(사도세자의 비 헌경왕후)에 의해 진도 금갑도로 유배되었다.
안동김씨가 집권하자 1807년(순조 7) 진도 유배에서 5년 만에 풀려났다. 1812년(순조 12) 대호군으로 재직시 세도(世道)를 주장하였는데, 이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자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저술]
자신의 시조 50수를 수록한『금강영언록(金剛永言錄)』이 있다. 여기에 수록된 시조는 모두 1802년 8월 11일부터 9월 8일까지 한 달 동안 진도군 금갑도(金甲島)에서 유배 생활 중에 지은 작품이다.
진도군 출신 박진종(朴震琮)의 요청에 의하여 저술한『순칭록(循稱錄)』이란 예의범절에 관한 저서가 있다. 같은 유배 시기의 글 40여 편을 모은 가사집으로 『금강중용도가(金剛中庸圖歌)』가 있다.
[상훈과 추모]
퇴직 후에 봉조하(奉朝賀)를 받았다
[의의와 평가]
진도에 5년 남짓 유배되어 있는 기간 동안 진도 군내 청년 학도들의 훈육과 교화에 이바지한 것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