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5017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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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二星 |
영어음역 | Nam Iseo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남도 진도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정호 |
[정의]
조선 중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중휘(仲輝), 호는 의졸(宜拙). 좌의정 남지(南智)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남아(南啞)이고, 증조부는 남언순(南彦純), 아버지는 평강현감 남리(南裡)이다. 어머니는 서주(徐澍)의 딸이다. 아들은 남세하(南世夏)·남상하(南相夏)·남수하(南壽夏)·남성하(南聖夏)·남서하(南瑞夏)·남경하(南敬夏)·남덕하(南德夏)가 있다. 사위는 민진장(閔鎭長)이고, 증손은 남수현(南壽賢)이다. 박세당의 처숙부이기도 하다.
[생애]
1625년(인조 3)에 태어났다. 1657년(효종 8) 사마시에 합격하여 내시교관(內侍敎官)이 되었고, 1662년(현종 3)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지평·교리를 역임하고 북도평사(北道評事)로 나갔다가 1674년(현종 14) 예조참의를 거쳐 대사간이 되었다. 이후 홍문관부제학을 거쳐 예조참판에 재직하면서 동지겸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 예조판서를 지냈다. 1683년(숙종 9) 향년 58세로 세상을 떠났다.
[활동사항]
1675년(숙종 1) 인조의 계비이던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로 남인과 서인 간에 예송 논쟁이 일어났다. 이때 남인이 주장하는 기년설(朞年說, 1년 상복)이 채택되면서 남인이 득세하였다.
남인이 득세하자 대공설(大功說, 9개월 상복)을 주장하던 서인의 영의정 김수항이 원주로 유배되었다. 이에 남이성은 남인 권대운(權大運)을 규탄하고 김수항을 변호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진도에 유배되었으며 이후 백천(白川)으로 다시 이배되었다. 1678년(숙종 4)에 귀양에서 풀려났다.
1680년(숙종 6) 좌부승지에 이어 대사성이 되었을 때 대동법의 폐단을 지적한 시무소를 올렸다.
[저술]
왕명에 의하여 남이성(南二星)이 정양(鄭瀁)의 『어록해』를 개수하여 간행한 중국의 속어사전(俗語辭典)을 찬하여 1669년(현종 10)에 진정하였다.
[상훈과 추모]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장간(章簡)이다. 진도의 봉암서원에 노수신과 합향되었다.
[의의와 평가]
일찍부터 재간과 명성이 있었으며, 조정에서 국사를 의논할 때에는 항상 관대하고 공평하였으며, 시비와 사정(邪正)을 변론하는 데 의연한 태도를 취한 인물로 평가된다. 진도에서 3년 여 남짓 유배 기간 동안 진도 군민의 교화에 공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