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5018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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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敬輿 |
영어음역 | Yi Gyeongyeo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남도 진도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정호 |
[정의]
조선 중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직부(直夫), 호는 백강(白江), 봉암(鳳巖)이다. 세종의 7대손이며, 증조부는 이구수(李耉壽), 할아버지는 첨정(僉正) 이극강(李克綱), 아버지는 목사 이수록(李綏祿), 어머니는 송제신(宋濟臣)의 딸이다. 아들로는 이민장(李敏章), 이민적(李敏迪), 이민서(李敏敍), 이민채(李敏采)가 있고, 동생으로 이정여(李正輿)가 있다. 아내는 해평(海平) 윤승훈(尹承勳)의 딸이다.
[생애]
1585년(선조 18)에 태어났다. 문과 급제 후 검열, 수찬, 부제학, 청주목사, 전라도 관찰사, 대사헌, 영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1657년(효종 8)에 72세로 사망하였다.
[활동사항]
1601년(선조 34) 사마시를 거쳐, 1609년(광해군 1)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1611년 검열이 되었으나, 광해군의 실정이 심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직후 수찬(修撰)에 취임했고,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공주에 호종하였다. 이어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이 되었으며, 1630년(인조 8) 부제학(副提學)·청주목사·좌승지·전라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모시고 남한산성에 피란하였다. 이듬해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고, 그 뒤 이조참판으로 대사성을 겸임해 선비 양성의 방책을 올렸으며, 이어 형조판서에 승진하였다.
1642년 배청친명파로서 청나라 연호를 사용하지 않는 것을 이거(李据)가 청나라에 밀고해 심양(瀋陽)에 억류되었다가 이듬해 세자와 함께 귀국해 대사헌이 되었고, 이어 우의정 자리에 올랐다. 1644년 사은사로 청나라에 갔다가 다시 억류되었으나, 그동안 본국에서는 영중추부사라는 벼슬을 내렸다.
이듬해 귀국, 1646년 민회빈 강씨(愍懷嬪姜氏)[昭顯世子嬪]의 사사(賜死)를 반대하다가 진도에 유배되었고, 다시 1648년 삼수에 위리안치되었다. 이듬해 효종이 즉위하자 풀려나와 1650년(효종 1)에 다시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이어 영의정으로 다시 사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온 뒤 청나라의 압력으로 영중추부사로 직책이 옮겨졌다.
[학문과 사상]
시문에 능하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저술]
저서로는『백강집』이 있다.
[상훈과 추모]
부여의 부산서원(浮山書院), 진도의 봉암사(鳳巖祠)와 흥덕(興德)의 동산서원(東山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한편 봉암서원은 1602년 지산면에 경현사(景賢祠)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가 1676년 읍내 읍성 북쪽으로 옮기면서 정홍익·이경여가 추배되고(1684) 이름도 이경여의 호를 따서 봉암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