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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501881
한자 趙泰采
영어음역 Jo Taechae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전라남도 진도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정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아버지 조희석(趙禧錫)
어머니 백홍일(白弘一)의 딸
성별
생년 1660년연표보기
몰년 1722년 10월 27일연표보기
본관 양주(楊州)
유량(幼亮)
이우당(二憂堂)
시호 충익(忠翼)
제향 사충서원(四忠書院)|봉암사(鳳巖祠)
대표관직 좌의정|판중추부사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유량(幼亮), 호는 이우당(二憂堂)이다. 조존성(趙存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형조판서 조계원(趙啓遠)이고, 아버지는 괴산군수 조희석(趙禧錫)이다. 어머니는 백홍일(白弘一)의 딸이다. 조태구(趙泰耉)의 종제이며, 조태억(趙泰億)의 종형이다.

[생애]

1660년(현종 1)에 태어났다. 1686년(숙종 12) 별시문과에 종형 조태구와 함께 병과로 급제하였다. 내직으로 승문원의 정자·저작·박사와 성균관의 전적·직강, 사헌부의 감찰·지평·대사헌, 사간원의 정언·헌납·대사간, 홍문관의 수찬·교리, 승정원의 동부승지, 장례원의 판결사, 한성부의 판윤, 그리고 육조의 판서, 좌참찬 겸 판의금부사 등을 거쳐, 1717년 좌의정에 이르고 판중추부사에 전직하였다.

외직으로는 옥구현·공주목사·평안감사 등을 역임하였다. 1713년 동지사(冬至使)로, 1720년(경종 즉위년) 사은사(謝恩使)로 두 차례 청나라에 다녀온 바 있다. 1722년(경종 2) 진도에서 사망하였다.

[활동사항]

조태채는 도량이 크고 사려가 깊으며 해학을 즐겨 담론을 잘 했고, 풍채가 썩 훌륭했다고 한다. 족질이 대부분 소론에 기운 데 반해, 그는 유독 노론에 머물렀다. 그는 당시 공론(公論)의 부재 현상을 통렬히 비판했고, 당론에 대해서도 비판적 입장을 취하였다.

숙종이 소론을 배척하여 윤선거(尹宣擧)의 문집을 훼판(毁板)하고 그를 배향하던 서원까지 훼철하려 하자, 은액(恩額)만을 철회한다면 다른 일반 향사(鄕祠)와 다를 바 없이 되고, 또 향사는 조정에서 간섭할 바가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은액만 철회할 것을 왕에게 진언, 이를 관철시켰다.

경종이 즉위한 후 정국이 더욱 혼란해져가는 가운데 정언 이정소(李廷熽)의 건저상소(建儲上疏)를 채택,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판부사 이봉명(李蓬命),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호조판서 민진원(閔鎭遠) 등과 함께 1721년 연잉군(延礽君)[뒤의 영조]의 세제책봉을 건의, 실현시켰으며, 이어 세제의 대리청정까지 이르게 하였다.

그러나 소론인 우의정 조태구의 지휘를 받은 사직(司直) 유봉휘(柳鳳輝)의 건저반대소(建儲反對疏)와 좌참찬 최석항(崔錫恒)의 대리청정 환수(還收)를 청하는 소 등 소론의 적극적인 반대로 대리청정의 명이 철회되고 건저를 주장했던 노론세력이 대거 정계에서 제거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그해 전 승지 김일경(金一鏡)이 올린 노론 4대신 축출의 소가 승정원에서 채택되어 판중추부사로 있던 조태채는 진도에 유배되고 다음해 적소에서 사사되었다. 1725년(영조 1) 우의정 정호(鄭澔)의 진언으로 복작(復爵)되었으며 절도(絶島)에 나누어 유배되었던 자녀들도 모두 풀려나게 되었다.

[저술]

저서로 『이우당집(二憂堂集)』이 있다.

[상훈과 추모]

과천의 사충서원(四忠書院)과 진도의 봉암사(鳳巖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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