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5019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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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魏种墓 |
영어음역 | Wi Chung Myo |
영어의미역 | Tomb of Wi Chu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능묘 |
지역 |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 남동리 남산마을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정명철 |
성격 | 분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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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시기/연도 | 고려 후기 |
관련인물 | 위충 |
소재지 주소 |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 남동리 남산마을 |
[정의]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 남동리 남산마을에 있는 위충의 묘.
[위치]
진도읍에서 죽엽리로 향하는 803번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남산교회가 있는데, 여기서 150m 정도 떨어져 유적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남산[245.3m]의 북쪽 경사지에 해당하는 곳이다.
[금석문]
비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위충은 장흥 사람으로 용호장군(龍虎將軍) 윤기의 아들이며, 간성군사(杆城郡事) 수(脩)의 손자이다. 선생은 고려 말엽에 상의원직장(尙衣院直長)·합문지후(閤門祗侯)·판사(判事)를 역임하였다.
공양왕 때에 이르러 이성계의 세력이 점점 커져 고려 조정을 전복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아채고, 시중 김종연·심덕부·판삼사사(判三司事) 지용기 및 조유·장익 등과 함께 모의하여 이성계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일을 준비하던 중에 함께 모의한 서경천호(西京千戶) 윤귀택의 밀고로 일이 발각되었다.
이에 왕이 평리(評理) 박장에게 명하여 대간(臺諫)과 함께 국문(鞠問)하여 죄를 다스리라고 명하였는데, 김종연은 사형을 받아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지고 공은 장백원류형(杖百遠流刑)을 받아 귀향하는 한편 자손들도 금고형(禁錮刑)을 당하였다.”
[현황]
위충의 묘는 1980년대 후반 진도문화원에서 실시한 군내 사적지 조사를 통해 발견되었다. 이에 1988년에 묘역을 정비하고 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