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07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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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堉旌孝碑 |
영어음역 | Jeong Yuk Jeonghyobi |
영어의미역 | Monument to the Filial Piety of Jeong Yuk |
이칭/별칭 | 동몽교관조봉대부역효당정효비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강병주 |
[정의]
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면 용암리에 있는, 동몽교관 역효당(亦囂堂) 정육의 효행을 기록하여 세운 정려비.
[개설]
정식명칭은 ‘동몽교관조봉대부역효당정효비(童蒙敎官朝奉大夫亦囂堂旌孝碑)’로, 1892년(고종 29) 고종황제가 효자 정육의 효행을 기려 동몽교관 조봉대부에 증직하고 정려를 내린 내용을 새긴 비이다.
[건립경위]
정육의 5세손 정영석이 나라로부터 정려를 받은 은덕을 드러내고자 1942년 임오년 청명절에 정창석과 힘을 합하여 세웠다. 수양(首陽) 오진영(吳震泳)이 비문을 찬하고, 허문구(許汶九)가 글씨를 썼다.
[위치]
용암리 본동마을에 있다.
[형태]
비는 오석의 화강암으로 높이 159㎝, 너비 53㎝, 두께 25㎝이다. 비의 받침돌은 사각형의 형태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둥글게 되었고, 비는 직육면체로 하여 비의 머릿돌은 기와지붕 형태를 하고 있다.
[비문]
정육의 효행이 지극하였고, 어머니상을 당하여 지극한 예를 다한 나머지 생명이 위태로움에 이르렀고, 다시 아버지상을 당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예를 다하여 마침내 상이 끝난 지 수개월 후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원근의 선비들이 정려를 요청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월이 흐른 뒤 고종황제에 이르러 정려를 받았다는 내용이다.
[현황]
비의 받침돌과 비, 그리고 덮개돌로 세워진 비석을 사방으로 벽돌을 쌓아 보호를 하고 있다. 해주정씨 불우헌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