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19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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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住生活 |
영어음역 | jusaenghwal |
영어의미역 | housing life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집필자 | 최해열 |
[정의]
사는 곳이나 사는 지역에서의 생활 모습.
[주거 유적]
진주지방의 주거 흔적은 진주시 대평면 유적에서 찾을 수 있다. 대평리 집터유적은 마을 앞을 흐르는 남강변의 평야지대에 넓게 분포되어 있다. 대평리 집터유적은 진주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집터의 흔적인데, 기원전 1000년~300년 사이의 청동기시대 유물로 기록되어 있다.
대평리 집터는 동서로 18.6m, 남북이 4.6m에 깊이는 30㎝인 대규모 장방형(長方形) 움집이다. 바닥은 원래 사질토층을 약간 다졌으나 벽은 판자로 보강한 듯 사방에 두께 2㎝ 내외의 목탄선(木炭線)이 나타났다. 바닥의 중앙부에서는 장축방향을 따라 지름 10㎝, 깊이 40㎝의 기둥구멍이 1.8~2m 간격으로 있음이 조사됐다. 바닥의 중앙부에서 약간 동쪽으로 치우친 곳에서는 불 땐 자리로 추정되는 길이 110㎝, 폭 60㎝의 회색 소토층이 조사됐다. 움집은 땅을 파고 그 위에 지붕을 덮은 형태인데 땅을 판 것은 땅 속으로 일정 깊이 이상 내려가면 온도 변화가 적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며, 또 하나는 지표 위의 건물 높이를 가능한 낮추기 위한 것이다. 이는 모두 기온의 영향력을 적게 받기 위한 지혜와 함께 건물이 낮음으로써 바람의 힘을 덜 받아 집이 튼튼한 효과를 생각했던 듯하다. 이 움집은 우리나라에서 조사된 움집 중 가장 규모가 큰 것 중의 하나이다. 대평리 집터는 단 하나가 발견되었지만 부근에 여러 개의 무덤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2500년 전에 이미 진주지방에 집단 취락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청동기시대부터 농경을 하게 되고 가축을 기르면서 정착생활을 하게 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주거문화]
인류가 정착생활을 하면서 주거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면서 주거문화도 급속한 발달을 보게 되었다. 초기의 집은 비바람과 추위를 견디는 정도로 만족했으나 점차 편리성이 요구되면서 풍수설(風水說)의 의론(議論)이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진주지역의 집 모양도 우리나라 남부지방의 보편적인 형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집의 배치는 대개 일정하여 건물이 하나일 때는 一자형 집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ㄱ자형이 있으나 진주지방에서는 ㄱ자형 집이 흔치 않았다. 부잣집의 경우에는 안채, 사랑채를 중심으로 여러 채의 부속건물을 지어 어마어마하게 복잡한 집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서민들은 안방이 있는 본채와 사랑방이 있는 바깥채 등 2동의 건물이 기본이었다. 바깥채는 주로 남자들이 거주하는 곳이고, 본채는 부녀자들의 거처 장소였는데 이는 내외가 엄격했던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다. 이 때문에 二자형 집이 흔했고 본채 하나뿐인 一자형 집에서는 큰방이 안방이고 작은방이 사랑방 구실을 했다.
주택의 발달은 용도별로 다양한 생활공간을 요구하게 되면서 비롯됐고, 이는 마루나 방을 활용하는 데에서도 나타난다. 사계절이 뚜렷한 자연환경과 농경 위주의 생활 때문에 환경과 농사일에 필요한 주택구조가 자연스럽게 형성된 셈이다. 추운 겨울에는 실내인 방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고, 봄부터 가을까지는 마루가 주생활 무대였다. 작물을 거두어 곡식을 터는 일과 씨앗을 다듬는 등의 준비는 마당에서 했기 때문에 마당 넓은 집이 필요했다. 이는 넓고 좁은 여러 개의 마루가 생겨난 이유가 되었고 마당 또한 주택의 일부분으로 여기게 되었다.
방의 대부분은 천장이 낮고 크기가 좁았는데, 이는 추운 겨울의 난방을 위해 온돌이 등장하고 온돌의 열기를 최대한으로 오래 보존하기 위한 것이었다. 방에는 대부분 이불이나 잡다한 물건들을 보관하는 다락방이 있었고, 방문도 허리를 구부리고 들어가야 할 만큼 작았다. 이는 방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바깥 공기로 방안의 온도가 빨리 식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주거형태의 특징]
진주지역의 주거형태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 집의 위치는 배산임수의 양지 바른 곳을 선택하고 남향을 가장 선호했으며, 북향은 금했다
○ 평야지역은 칸의 사이가 넓고 산촌은 좁다. 또 강이 많아 지붕을 짚 대신에 강가의 저습지에 자라는 갈대를 이용하기도 하고 산간지역에서는 억새풀을 엮어 덮는 일도 많았다.
○ 지붕은 우진각지붕이 많고 양반이나 부잣집에서는 팔작지붕을 선호했으며 맞배지붕도 흔했다.
○ 축담은 평지보다 약간 높게 쌓았는데 이는 습기와 물빠짐을 고려한 것이다.
○ 굴뚝은 높지 않고 지면에 붙어 연기가 빠지도록 했고 축담이 높은 집은 굴뚝이 축담으로 뚫려 있도록 했다. 이 때문에 진주지역에서는 저녁 연기가 마당에 자욱이 깔려 멀리서 보면 신비스럽게 보이기도 했다.
○ 마루의 모양은 양반집의 경우 대청을 우물마루로 놓았고 서민집은 장마루를 깔거나 툇마루가 많았다. 마루는 상당히 높은 편에 속해 마루 밑은 장작이나 멍석·농기구 따위를 넣어 보관할 만했다. 또한 기둥은 네모기둥이 일반적이었고 주춧돌은 자연석을 많이 이용했다. 대들보와 서까래는 드러나 보이도록 설계했다.
○ 담장은 흙돌로 쌓았고 부잣집에서는 담장 위에 기와를 얹었다. 기와 대신 짚으로 지붕을 만들거나 솔가지 등을 얹고 그 위에 흙을 덮어 모양을 내기도 했는데, 이는 비가 올 때 담장이 허물어지지 않는 지붕 역할을 했다. 서민층의 담장은 흙돌담 대신에 싸리나무와 삭정이를 엮은 울타리를 세우기도 했다.
○ 집안에는 유실수를 즐겨 심었는데 감나무와 석류나무·대추나무·앵두나무가 주종을 이루었다. 복숭아나무는 절대 금기수종인데 이는 귀신을 쫓는 나무라고 하여 명절 제사나 기제사 때 조상의 신이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속설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