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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3009
한자 曺植
영어음역 Jo Sik
이칭/별칭 건중(楗仲),남명(南冥),문정(文貞)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수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학자
아버지 조언형(曺彦亨)
어머니 인천이씨(仁川李氏)
출신지 경상남도 합천군
성별
생년 1501년연표보기
몰년 1572년연표보기
본관 창녕(昌寧)
건중(楗仲)
남명(南冥)
시호 문정(文貞)
추증 영의정
제향 덕천서원(德川書院)[경상남도 산청]|회현서원(晦峴書院)[뒤에 龍巖書院, 경상남도 합천]|신산서원(新山書院)[경상남도 김해]

[정의]

조선 전기의 학자.

[가계]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 본가는 삼가판현(三嘉板峴)[지금의 경상남도 합천지역]에 있었고, 토동(兎洞)은 외가이다. 아버지는 조언형(曺彦亨)으로 승문원판교(承文院判校)를 지냈으며 강직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어머니는 인천이씨(仁川李氏)로 충순위(忠順衛) 이국(李菊)의 딸이자 좌의정(左議政) 최윤덕(崔潤德)의 외손녀였다. 조식은 이들 사이에서 3남 5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김우옹(金宇顒)·곽재우(郭再祐)는 그의 문인이자 외손녀 사위이다.

[생애]

1501년(연산군 7) 6월 26일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토동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20대 중반까지 대체로 서울에 살면서 성수침(成守琛)·성운(成運) 등과 교제하며 학문에 열중하였고, 25세 때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읽고 깨달은 바가 있어 이때부터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30세 때 처가가 있는 경상남도 김해 탄동(炭洞)으로 이사하여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살면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1538년(중종 33) 유일(遺逸)로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임명되었지만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고, 45세 때 고향 삼가현에 돌아온 후 계복당(鷄伏堂)과 뇌룡정(雷龍亭)을 지어 제자들의 교육에 힘썼다.

1548년(명종 3)에서 1559년까지 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단성현감·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 등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지만 모두 사퇴하였다. 단성현감 사직 때 올린 상소에는 조정의 신하들에 대한 준엄한 비판과 함께 국왕 명종과 대비(大妃) 문정왕후(文貞王后)에 대한 직선적인 표현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다.

모든 벼슬을 거절하고 오로지 처사(處士)로 자처하며 학문에만 전념하자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졌고, 1551년 오건(吳健)에 이어 정인홍(鄭仁弘)·하항(河沆)·김우옹(金宇顒)·최영경(崔永慶)·정구(鄭逑) 등 많은 학자들이 찾아와 그의 학문을 배워갔다. 1561년에 지리산 기슭 진주 덕천동(德川洞)[지금의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으로 자리를 옮겨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며 학문정진에 힘썼다.

1566년 상서원판관(尙瑞院判官)을 제수 받고 왕을 만나 학문의 방법과 정치의 도리에 대해 논하고 돌아왔으며, 1567년 즉위한 선조가 여러 차례 조정으로 그를 불렀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1568년(선조 1)에는 올바른 정치의 도리를 논한 상소문 「무진봉사(戊辰封事)」를 올렸는데, 여기에서 논한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은 당시 서리의 폐단을 극렬하게 지적한 것으로 유명하다.

[학문과 사상]

조식의 학문과 사상은 노장적(老莊的) 요소가 다분히 엿보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성리학적 토대 위에서 실천궁행(實踐躬行)을 강조한 것으로 평가된다.

실천적 의미를 더욱 부여하기 위해 경(敬)과 아울러 의(義)를 내세웠는데, 이는 경의협지(敬義夾持)를 표방하여 ‘경’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써 외부 사물을 처리해 나간다는 생활철학을 견지한 것이다. 이러한 신념을 바탕으로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으며, 사회현실과 정치적 모순에 대해서 적극적인 비판의 자세를 유지했다.

학문방법론에 있어서도 초학자에게 『심경(心經)』·『태극도설(太極圖說)』 등 성리학의 본원과 심성(心性)에 관한 내용을 먼저 가르치는 이황(李滉)의 교육방법을 비판하고, 『소학』·『대학』 등 성리학적 수양에 있어서도 기초적인 내용을 먼저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이황기대승(奇大升)을 둘러싸고 일어난 이기심성(理氣心性) 논쟁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에서 접근하여, 이를 ‘하학인사(下學人事)’를 거치지 않은 ‘상달천리(上達天理)’로 규정하고,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의 단계적이고 실천적인 학문방법을 주장하였다.

조식이 만년에 살았던 덕산과 가까운 진주에는 각재(覺齋) 하항(河沆)과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 등이 조식의 학문에 영향을 받았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진주 지역의 문풍이 크게 진작되었다.

[저술]

주요 저서에는 문집 『남명집』과 그가 독서 중 차기(箚記) 형식으로 남긴 『학기유편(學記類編)』 등이 있다.

[작품]

작품으로는 「남명가」, 「권선지로가(勸善指路歌)」 등이 있다.

[묘소]

조식의 묘는 현재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원리(矢川面 院里)에 있다. 둥근 봉분에 묘역이 200㎡ 정도이며, 비 4기와 망주석(望柱石)·상석(床石)이 있다. 조식 묘를 비롯한 이 일대 산천재와 덕천서원 등의 ‘조식 유적’은 사적 제305호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1576년 조식의 제자들이 산천재 부근에 덕천서원을 건립한 데 이어, 고향 삼가현에 회현서원(晦峴書院)[뒤에 용암서원(龍巖書院)]을 지었고, 1578년에는 경상남도 김해에 신산서원(新山書院)이 건립되었다.

광해군 재위 시절 대북(大北) 세력이 집권하자 조식의 문인들이 스승에 대한 추존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여 세 서원들이 모두 사액되었고, 조식에게는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진양지(晋陽誌)』권3「인물조(人物條)」에 진주의 인물로서 이름이 올랐다.

[의의와 평가]

조식의 사상은 제자들에게로 그대로 이어져 진주를 포함한 경상우도의 특징적인 학풍을 형성하였고, 경상북도 안동지방을 중심으로 한 이황의 경상좌도 학맥과 더불어 영남 유학의 두 봉우리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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