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05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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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始成 |
이칭/별칭 | 집경(集卿),만의당(晩依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경화 |
[정의]
조선 후기에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속했던 인천도호부에서 활동한 문신.
[가계]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집경(集卿), 호는 만의당(晩依堂)이다. 증조는 효릉 참봉(孝陵參奉) 증좌통례(贈左通禮) 정제(鄭濟)이며, 조부는 증승정원 좌승지(贈承政院左承旨) 정여온(鄭汝溫)이다. 증의정부 좌참찬(贈議政府左參贊) 정용(鄭涌)과 신계(新溪) 현령(縣令) 이중기(李重基)의 딸 전의 이씨(全義李氏) 사이에서 6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부인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허평(許坪)의 딸 양천 허씨(陽川許氏)이다.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는데, 첨지중추부사 정인빈(鄭寅賓), 정종빈(鄭宗賓), 정수빈(鄭守賓)의 아들이 있으며, 손자로는 정수기(鄭壽期) 등이 있다.
[활동 사항]
정시성(鄭始成)[1608~1686]은 1633년(인조 11) 식년시 진사 1등 2위로 합격, 1639년(인조 17) 별시 을과 1위로 급제하여 검열, 봉교 등을 지냈다. 이후, 전적(典籍), 임피(臨陂) 현령(縣令), 능주(綾州) 목사(牧使), 진주(晉州) 목사(牧使), 영광(靈光) 군수(郡守), 정언(正言), 금산(錦山) 군수(郡守), 길주(吉州) 목사(牧使), 형조 참의(刑曹參議),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 호조 참의(戶曹參議), 강원(江原) 감사(監司), 예조 참의(禮曹參議) 등을 역임하면서, 매사에 일을 공정하고 엄격하게 처리하여 백성들이 모두 그를 칭송하였다.
1650년(효종 1) 지평으로 있으면서, 상주 목사인 김동일을 국상 시에 처를 거느렸다는 이유로 탄핵하였으나, 무고로 밝혀져 체직당한 바 있으며, 1668년(현종 9)에는 장령으로서 황장목(黃場木)을 무단으로 벌목한 안동 부사 권집(權諿)과, 외척 오정위(吳挺緯), 부정한 혐의를 받고 있던 이찬한(李燦漢) 등을 탄핵해 체직시켰다. 또한 훈련도감의 조총 값을 지방에 분정하지 말 것을 요구하였으며, 그 밖에 언관으로서 대동법 시행 후, 민간에 유청지지(油淸紙地) 값을 횡령하는 폐단을 논하는가 하면, 왕의 견책으로 물러난 이숙 등 8인을 서용할 것을 주청하였다.
한편 1640년(인조 18), 가주서(假注書)였던 정시성은 인천에 사는 노모의 병환 소식을 듣고 인천 지역으로 내려오게 되는데, 인천은 그의 증조부 정제 때부터 인연을 맺기 시작하여, 영일(迎日) 정씨[연일, 영일, 오천(烏川)은 같은 곳을 일컫는 지명이기에 연일 정씨, 영일 정씨, 오천 정씨 모두 같은 성씨임]의 재지 기반으로 역할을 한 곳이었다. 그의 일가는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문학산, 학동, 도곡 일대를 중심으로 생활하였으며, 묘도 인천광역시 연수구 청량산에 있다.
[학문과 저술]
조선 중기 문신인 권득기(權得己)의 묘 뒷면에 기록된 묘갈문은 심지원(沈之源)이 지은 글을 정시성이 소해(小楷)로 정성들여 썼다고 전한다.
[묘소]
인천부의 원우금면(遠又今面)[현 인천광역시 연수구 청량산 일대]에 있는 연일 정씨의 묘역에 무덤이 있다.
[상훈과 추모]
사후에 이조 판서로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