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05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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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翬良 |
이칭/별칭 | 자우(子羽),사서(士瑞),남애(南崖),문헌(文憲)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경화 |
[정의]
조선 후기에 현재의인천광역시 미추홀구를 포함한 인천광역시를 세거지로 했던 연일 정씨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자우(子羽), 사서(士瑞), 호는 남애(南崖)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정시성(鄭始成)이며, 할아버지는 정인빈(鄭寅賓)이다. 아버지인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조선 시대 외척을 관장하던 돈녕부의 종1품 관직] 정수기(鄭壽期)와 어머니인 윤희수(尹希壽)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형은 우의정을 지낸 정우량(鄭羽良)이다. 정치달(鄭致達)의 숙부이다. 처는 조태만(趙泰萬)의 딸이다.
[활동 사항]
정휘량(鄭翬良)[1706~1762]은 1733년(영조 9)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생원이 된 후, 1737년(영조 13) 별시 문과에 을과 2위로 급제하여, 시독관(侍讀官),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를 지냈다. 1755년(영조 31) 경종~영조 대에 일어난 토역(討逆)의 사실을 모아 기록한 『천의소감(闡義昭鑑)』의 찬집 당상(纂輯堂上)이 되었으며, 이듬해 홍문관 제학(提學)을 거쳐 대제학(大提學)에 오르게 된다. 이후 호조(戶曹), 공조(工曹), 이조(吏曹), 병조(兵曹)의 판서(判書)를 두루 역임하고, 평안도 관찰사(平安道 觀察使)로 나갔다가, 1761년(영조 37)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좌의정(左議政)에 올랐다.
당시 정휘량은 소론(少論)의 제거를 주장하면서, 왕에게 소론의 영수였던 조태구(趙泰耈)·유봉휘(柳鳳輝)를 노적(奴籍)하고, 이광좌(李光佐)·최석항(崔錫恒) 등의 관직을 추탈(追奪)[죽은 사람의 죄를 논하여 살았을 때의 벼슬 이름을 깎아 없앰]하도록 청하였다. 그리고 곧바로 사직하여,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의 한직으로 전직하였다. 하지만 정휘량은 소론 완론탕평파(緩論蕩平派)의 조문명(趙文命), 조현명(趙顯命)의 후광으로 정승의 자리까지 오르게 된 인물이다. 또한 무진, 기사 연간에는 형인 정우량과 함께 붕당을 없앤다는 명목 아래 척신 홍계희(洪啓禧), 김상로(金尙魯) 등과 은밀히 통하여 사설(辭說)을 일으키고, 그들의 정권 장악을 도왔다. 그리고 조카인 정치달과 정치달의 처 화완 옹주의 도움으로 권력을 얻게 되면서, 외척 세력의 입장을 대변하기도 하였다.
16세기 후반 정제(鄭濟)가 인천 지역으로 내려온 이래로, 연일 정씨 일가는 인천을 재지 기반으로 삼아왔다. 특히 18세기 정씨 일가는 정휘량, 정후겸 등에 의해 인천광역시 미추홀구로 생활 기반을 확대하였다. 인천광역시 연수구 청량산 부근에는 영일 정씨의 선영이 조성되어 있다.
[학문과 저술]
정휘량은 문집으로 『남애집(南崖集)』, 저서로 『견사록(見思錄)』을 남겼다.
[묘소]
정휘량은 인천광역시 연수구 동춘동 도곡산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