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06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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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善仁學園市公立化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현석 |
성격 | 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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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인물/단체 | 백인엽|선인학원|선인학원 사태를 우려하는 시민의 모임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81년 3월 18일 - 선인 학원 설립자 백인엽 업무상 횡령 등의 혐의로 구속 |
종결 시기/일시 | 1994년 3월 1일 - 선인 학원 시·공립화 확정 |
전개 시기/일시 | 1991년 - 범선인 학원 정상화 추진위원회 인학원 현 재단의 전면 개편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청와대 등에 제출 |
전개 시기/일시 | 1992년 - 인천 지역 각계 인사,선인 학원 사태를 우려하는 시민의 모임 결성 |
전개 시기/일시 | 1993년 6월 9일 - 백인엽 선인 학원의 권한 일체를 인천시장에 넘긴다는 기증서 제출 |
전개 시기/일시 | 1993년 12월 - 교육부 선인 학원 시·공립화 계획 결정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58년 - 백인엽 성광 학원 인수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65년 - 성광 학원 선인 학원으로 명칭 변경 |
발생|시작 장소 | 선인 학원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도화동 |
[정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도화동에 위치한 선인 학원이 학내 분규를 겪어 오다가 1994년 3월 1일 시·공립화된 사건.
[개설]
1981년 선인 학원 설립자인 백인엽이 부정 편·입학 등과 관련해 구속된 이후 학내 분규가 끊이지 않다가 1994년 인천 대학교를 비롯한 선인 학원 산하 학교들이 시립화 또는 공립화되어 새로 출범하였다.
[역사적 배경]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도화동에 위치한 선인 학원은 백인엽이 1958년 성광 학원을 인수해 ‘선인’으로 학원명을 바꾸며 출발한 학교 법인이다. 백인엽은 이에 앞서 1964년 인화 여자 중학교와 인화 여자 상업 고등학교를 설립하고, 1965년 성광 중학교를 선인 중학교로 교명을 바꾸며 학교 사업을 준비해 왔다. 그 후 1965년 항도 상업 기술 학교를 인수하고, 효열 국민학교를 설립하는 등 1970년대 말까지 학교 설립을 계속 이어가며 선인 학원의 규모를 키워 나갔다. 선인 학원 설립 이후 선인 학원 소속 학교들의 주요 설립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66년 인화 여자 상업 고등학교를 폐교하고 인화 여자 고등학교를 설립, 1968년 선화 여자 중학교 설립, 1969년 인천 공업 고등 전문 학교 설립, 선화 여자 상업 고등학교 설립, 1971년 운봉 공업 고등학교 설립, 1972년 인천 체육 전문 학교 설립, 1973년 선인 상업 고등학교를 선인 고등학교로 변경, 1975년 항도 실업 고등학교 설립, 인천 체육 고등학교 설립, 1977년 운산 기계 공업 고등학교 설립, 1979년 인천 대학 설립, 1981년 인천 체육 전문 대학과 인천 공업 전문 대학을 인천 전문 대학으로 통합 등이다.
백인엽이 1981년 3월 18일 학생들의 부정 편·입학 등에 의한 업무상 횡령·배임 수재 등의 혐의로 구속되자 ‘국민에게 속죄하는 뜻’으로 선인 학원을 국가에 헌납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1983년 관선 이사 중 일부를 철수시키고 새로운 이사진을 구성하면서 선인 학원 설립자 측에서 내세운 이사들을 임명하여 사실상 선인 학원의 운영권이 다시 설립자 측에 돌아가도록 조치를 취하여 분쟁의 소지를 남겨두었다.
결국 1985년 10월 백인엽이 선인 학원 건설 고문으로 복귀하며 학원 운영에 간여하기 시작하자 인천 대학교 학생들의 농성이 이어지면서 1986년 10월 31일 인천 대학교에 무기한 휴교령이 내려지는 등 선인 학원 문제가 표면화되기 시작하였다. 1989년 6월 8일에는 인천 대학교 교수 협의회, 인천 대학교 교직원 노동조합, 선인 학원 교사 협의회, 인천 대학교 학생회, 인천 전문 대학 학생회 등 5개 단체 500여 명이 집회를 개최하여 백인엽과 선인 학원 이사진의 퇴진을 요구하였으며, 1991년 선인 학원 산하 12개교 교직원 370여 명으로 구성된 ‘범선인 학원 정상화 추진 위원회’가 ‘선인 학원 현 재단의 전면 개편’을 촉구하는 진정서를 청와대 등에 제출하는 등 선인 학원의 학내 분규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악화되어 갔다.
[경과]
1992년 1월 인천 지역의 각계 인사들이 모여 ‘선인 학원 사태를 우려하는 시민의 모임’을 결성, 선인 학원 문제를 수습하기 위해 나섰으며 1992년 4월 시립 및 공립화를 위한 인천 시민 10만 명 서명 운동을 전개하면서 인천시에 시립 및 공립화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파행적인 학사 운영과 계속된 학내 시위로 학교 운영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자 1993년 6월 9일, 설립자인 백인엽이 선인 학원 산하 14개 각급 학교의 시립화 또는 공립화를 조건으로 최기선 인천 시장에게 권한 일체를 넘긴다는 내용의 기증서를 제출하였으며, 인천시는 이튿날인 1993년 6월 10일 선인 학원을 인수해 인천 대학교와 인천 전문 대학은 시립화하고 나머지 초·중·고등학교는 공립화하는 계획을 발표함으로써 선인 학원 시·공립화가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했다. 이어 1993년 12월 교육부가 선인 학원의 시·공립화 계획을 결정하였다.
[결과]
1994년 3월 1일 선인 학원 산하 인천 대학교와 인천 전문 대학이 시립화되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가 공립화되며 공식 출범하였다.
[의의와 평가]
선인 학원 시·공립화는 ‘선인 학원 정상화’를 열망하는 인천 시민과 사회단체들이 힘을 합하여 이루어낸 결과였으며, 이런 점에서 단순히 한 사학 재단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천 교육사에 큰 획을 긋는 중요한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