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1759 |
---|---|
한자 | 自己-兩班-寡婦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문학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최인학 |
성격 | 전설 |
---|---|
주요등장인물 | 홍 판서 |
모티프유형 | 자기 귀를 자르면서까지 세도가에게 저항한 과부 |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 2001년 7월 - 「자기 귀를 자른 양반집 과부」 채록 |
관련 지명 | 학산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학익동 |
[정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 전하는 양반집 과부에 관한 이야기.
[개설]
부평 이씨(富平李氏)가 모여 사는 인천부 학익동 땅은 풍수가 좋아 인재가 나고 평화스러운 고을이다. 그런데 한양의 세도가 홍 판서가 죽자 이곳에 장지를 정했다고 한다. 이에 감히 아무도 저항하지 못했지만 한 과부가 나서서 자기 귀를 자르면서까지 항의를 했다는 줄거리이다.
[채록/수집 상황]
『문학산의 역사와 문화 유적』에 따르면, 2001년 7월에 인하 대학교 강사인 이장섭과 한양 대학교 대학원생인 구은아, 진선희 등이 문학산 일대의 마을을 조사하면서 채록한 것이다. 제보자는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문학동에 거주하는 당창영[남, 79세]이다.
[내용]
구한말 인천 지방에서 일어난 이야기이다. 지금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학익동인 인천부 학익동에는 부평 이씨가 집단으로 살고 있었다. ‘학익동(鶴翼洞)’의 학익(鶴翼)이란 학의 날개를 뜻하는데 부평 이씨들은 이곳의 학산(鶴山)에 묘를 써서 인재가 많이 나고 잘 살았다. 그런데 한양에 사는 세도가 홍 판서가 죽으니 그의 자손들이 이곳 학산에 묘를 쓰게 되었다. 당시 홍씨의 세력에 눌려 부평 이씨들은 감히 이에 대항할 수 없었다. 그러자 부평 이씨 집안의 한 젊은 과부가 앞장서서 항의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과부는 홍 판서 집에서 묘를 쓰겠다고 파 놓은 구덩이에 홀몸으로 들어가 꼼짝도 하지 않고 묘를 쓰지 못하게 버티었다. 그러자 홍 판서집 상주들이 모여 강제로 그 과부를 끌어내기로 의결했다. 이에 과부는 분하기도 하고 하찮은 인부들이 자기의 귀를 잡았다고 해서 그 자리에서 칼로 자기의 귀를 잘라 버렸다. 그 과부는 일생을 두고 한쪽 귀로 지냈다. 당시 풍습에 상스러운 상두꾼이 양반집 부녀자의 귀를 손으로 잡았으니 큰 문제가 될 뿐 아니라 과부 역시 매우 수치스럽게 여겼던 것이다.
[모티프 분석]
「자기 귀를 자른 양반집 과부」는 풍수설을 배경으로 형성된 이야기로 결국 명당을 통한 현세 구복적 의지를 표현한 설화이다. 조상의 묘를 명당에 쓰면 조상이 왕성한 지기를 받고 그 영향으로 후손들이 복을 받는다고 믿었다. 한양의 세도가인 홍 판서의 자식들이 학산에 부모의 묘를 쓰고자 했던 것도 이러한 사고에 기반을 둔 것이다. 명당을 얻는 것이 가문의 성쇠와 후손의 행․불행을 좌우한다고 여겼기에 명당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것이다. 풍수설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명당자리를 차지하면 임자가 된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세도에 눌려 선산을 빼앗길 위기 상황에서 젊은 과부가 등장하여 홍 판서 댁의 처사에 항의한다. 이 과정에서 상여꾼의 손이 과부의 귀에 닿는다. 과부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귀를 자른다. 당시에는 옷깃에 남자의 손길만 스쳐도 자살할 이유가 충분했던 사회적 풍습에 비추어, 자신의 순수성을 강조하기 위한 행동이었던 것이다. 과부의 용감하고 불의에 저항하는 태도는 모든 사람들의 귀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