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05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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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安命夏 |
영어공식명칭 | Ahn Myungha |
이칭/별칭 | 국화(國華),송와(松窩)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현라 |
출생 시기/일시 | 1682년 - 안명하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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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752년 - 안명하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862년 - 광천서원 건립 |
출생지 | 밀양 - 경상남도 밀양시 |
사당|배향지 | 광천서원 -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사포중앙1안길 7[전사포리 620] |
성격 | 학자 |
성별 | 남 |
본관 | 광주(廣州) |
[정의]
조선 후기 밀양 출신의 학자.
[가계]
안명하(安命夏)[1682~1752]의 본관은 광주(廣州)이며, 자는 국화(國華), 호는 송와(松窩)이다.
[활동 사항]
안명하는 1682년(숙종 8)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시에서 태어났다. 천품이 빼어나고 조예(造詣)가 뛰어났으며, 특히 지극한 효행으로 마을 사람들의 귀감이 되었다.
9세 때 할머니의 병이 깊어지자 안명하는 손가락을 자르고 수혈하여 소생하게 하였다. 13세 때는 아버지 상을 당하여 예절을 지키며 어른처럼 슬퍼하여 세상 사람들이 지극한 효성이라 칭송하였다. 그 뒤 날마다 뒤뜰에 자생하는 송이를 캐어서 홀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이에 문암(門巖) 손석관(孫碩寬)이 「송균설(松菌說)」을 지어 옛날 왕상(王祥)이 한겨울에 죽순을 얻은 효성과 같다고 찬양하였다.
19세 때 안명하는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이 광양(光陽)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갈 때 진양(晋陽)에서 만나 배우기를 청원하였다. 이현일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한 지 50년 만에 이현일의 도통(道統)을 계승하고 깊이를 더하자 안명하에게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안명하는 어머니 상을 당하자 슬픔에 피를 토하며 죽을 마시고 3년의 상례 기간을 마쳤다. 재산을 나눌 때 좋은 논밭은 동생에게 주고, 친척과 이웃은 물론 불우한 처지의 타인도 힘껏 도왔다.
안명하는 스승을 존경하고 동료 간의 절의를 돈독하게 하였는데, 이현일이 사망하였을 때는 도집례(都執禮)의 중임을 맡아 장례를 주관하였다. 안명하는 1752년(영조 28)에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안명하는 평생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학통을 잇는 성리학과 예학을 깊이 연구하여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이상정(李象靖)·정만양(鄭萬陽)·정규양(鄭葵陽) 등과 교유하였으며, 안명하의 후진으로는 송덕륭(宋德隆)이 유명하다.
안명하가 남긴 글은 대구에서 아버지의 시묘살이를 하고 있는 여대익(呂大翊)에게 보낸 서간문 「여여대익(與呂大翊)」과 여대익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 「만여대익(輓呂大翊)」, 그리고 여대익의 효성에 감복하여 지은 「증여대익(贈呂大翊)」이 있다. 또 『송와집(松窩集)』 6권이 있는데, 성재(性齋) 허전(許傳)이 서문을 짓고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이 행장을 썼다. 그 밖에 『배운록(排雲錄)』 1권이 있다.
[상훈과 추모]
1862년(철종 13) 밀양 사림이 안명하를 추모하기 위하여 광천서원(廣川書院)[현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전사포리 620]을 창건하였는데, 1868년(고종 5)에 조령에 의하여 훼철되었다. 이후 문중에서 불천위(不遷位)[나라에서 허락한 제사]로 자손들이 제사를 받들다가 1979년에 광천서원을 복원하여 안명하를 배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