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05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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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安翔漢 |
영어공식명칭 | Ahn Sanghan |
이칭/별칭 | 익중(翊仲),동만(東巒)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현라 |
[정의]
조선 후기 밀양 출신의 학자.
[가계]
안상한(安翔漢)[1604~1661]의 본관은 광주(廣州)이며, 자는 익중(翊仲), 호는 동만(東巒)이다. 할아버지는 『옥천유고』를 저술한 안여경(安餘慶)이고, 아버지는 형조정랑 낙원 안숙(安璹)이다.
[활동 사항]
안상한은 1604년(선조 37)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시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활달하고 기질과 얼굴 생김이 대범해 보였으며 어떤 일에도 구애됨이 없었다. 일찍이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하는 데 뜻을 두어 경사자집(經史子集)[경서·사서·제자·문집]과 병형전곡(兵刑錢穀)의 글에 통달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일어나기 직전에 밀양에 살던 심명세(沈命世)가 서울에 가려는 뜻을 두고 “들으니 요사이 정시(庭試)가 있다 하니 동행하자.”라고 하였다. 안상한은 심명세가 말하는 기운이 다른 날과 다르다고 느껴 동조하지 않았다. 수개월 뒤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심명세가 공신으로 책봉되자 안상한은 혼잣말로 “전일에 가자 한 것은 과연 이것 때문이로구나.”라고 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인조가 남한산성에 피신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안상한은 “평생 글을 읽은 것은 오늘을 바르게 하기 위함이다.”라면서 양훤(楊暄), 이시노(李時老)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상주 지방에 이르렀다. 그러나 화친이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북쪽을 향하여 통곡하고 의병을 해산하고 고향 마을로 돌아온 뒤로는 벼슬의 뜻을 버리고 학문을 연마하며 여생을 보냈다.
진사 양훤(楊暄)과 사전(師傳) 노형필(盧亨弼) 등 선배 문인들이 안상한이 포부를 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였다. 안상한은 1661년(현종 2)에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안상한은 문집(文集)을 남겼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서문은 수당(修堂) 이만규(李萬珪)가 짓고, 행장(行狀)은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이 찬하고, 갈명(碣銘)은 벽진(碧珍) 이흥중(李興中)이 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