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0690 |
---|---|
한자 | 新幹會 密陽支會 |
이칭/별칭 | 밀양신간지회,밀양지회신간지회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박경연 |
설립 시기/일시 | 1927년 12월 19일 - 신간회 밀양지회 설립 |
---|---|
해체 시기/일시 | 1931년 - 신간회 밀양지회 해체 |
최초 설립지 | 신간회 밀양지회 - 경상남도 밀양시 미리벌중앙로1길 12-11[삼문동 721-10] |
성격 | 항일단체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밀양 지역에 있었던 신간회 소속 지회.
[설립 목적]
신간회 밀양지회는 신간회 강령 및 정책에 따라 밀양 지역 민족 주의 운동자와 사회 주의 운동자의 연합을 통한 민족 독립 운동을 실천해 나갈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변천]
신간회 밀양지회는 1927년 12월 11일 창립준비회를 거쳐 12월 19일 제1회 정기대회를 개최하여 정식 창립되었다. 윤치형(尹治衡)의 사회 아래 지방유지 20여 명이 밀양청년회관에 모여 밀양지회 설립을 가결하였고 이어 집행위원 13인을 선정, 밀양지회 설립총회가 19일 오전 10시 밀양청년회관에서 거행되었다. 12월 19일 오후 5시에는 임시의장 황상규(黃尙奎)의 사회로 회원 130명이 모였는데, 내빈으로는 신간회 본부에서 파견한 경성지회 소속 정헌태(鄭憲台)·박의양(朴儀陽), 대구지회장 최윤동(崔潤東)·대구지회원 신상태(申相泰), 양산에서 온 김철수(金喆壽)·전혁(全赫), 김해에서 온 김홍직(金洪稷) 등이 참석하였다. 뒤이은 임원선거에서 회장 황상규, 부회장 김병환(金鉼煥), 총무간사 안병희(安秉禧), 박임수(朴壬守), 윤세조(尹世曺), 정광호(鄭光浩), 박병기(朴炳器), 박도원(朴燾元), 김희지(金熙址)가 임명되었다.
신간회 밀양지회는 신간회 해소에 대하여 시종일관 해소 반대의 입장을 취하였는데, 1931년 1월 제4회 정기대회에서 신간회 해산에 대한 반대를 결의하고 신임위원들을 선발하여, 신임위원들에게 신간회 본부와 경성지회의 분규 문제를 위임하였다. 1931년 9월 일제에 의한 지역운동의 탄압과 활동가들의 구속이 진행되면서 밀양지회의 활동은 극히 위축되었다. 1931년 9월 그간 밀양 지역 민족해방운동과 신간회 지회를 이끌어 오던 황상규가 신병으로 사망하면서, 또한 1932년 여름 윤세주의 중국 망명으로 신간회 밀양지회는 사실상 해체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신간회 밀양지회는 1928년 2월 17일 비타협민족주의계열의 한 형태인 협동조합을 결성하였다. 이는 지주, 자본가들의 지역 엘리트와 지역 활동가들의 저항 엘리트 양측이 함께 참여한 경제조직으로, 1인 1구에, 1구 1원씩으로 한정하여 현금시가주의로 구매액에 표준하여 배당하였다. 취급 품목은 비료, 어물, 포백, 곡물, 잡화 등이었다. 1930년 4월까지의 활동이 확인되는 점으로 보아 밀양협동조합운동은 상당 기간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28년 4월 국농소 소작쟁의 사건 진상조사위원을 통하여 국농소 분쟁의 사태 추이에 관심을 보였고, 1928년 7월 하기 강좌에서는 경제, 조선어, 역사 등 3종류의 과목을 매일 3시간씩 일주일 동안 실시하였다.
1930년 4월 신간회 밀양지회는 제3회 정기대회를 개최하여 임원진을 대폭 교체하였는데, 이로써 신간회 창립 멤버들이 일선에서 후퇴하고 새로운 인물들로 간부진이 충원되었다[신임집행위원장은 김형달, 집행위원은 윤치형·박병기·조용숙·박도원·표문호·김희지·정광호·김경준·윤치견·안병희·손기채·하상우 등]. 1930년 10월에는 밀양 유림의 일부 세력이 지역 유지층과 담합하여 신분 상승을 꾀하고자 하였던 ‘밀양읍주지(密陽邑州志)’ 발행에 대한 반대운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의의와 평가]
신간회 밀양지회는 밀양청년운동과 의열단 관련자들이 대거 참여하여 다양한 지역운동,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밀양 지역의 청년, 농민, 여성, 노동운동 등을 추스르고 지역 부문 운동과 연대하면서 1920년대 후반 밀양 지역 민족운동의 선봉장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