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701255
한자 菊潭齋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1길 20[후사포리 440]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하강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7세기 - 국담재 건립
개축|증축 시기/일시 1978년 - 국담재 증축
개축|증축 시기/일시 1980년 - 국담재 사당 중수
현 소재지 국담재 -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1길 20[후사포리 440]지도보기
성격 재실
양식 팔작지붕
정면 칸수 5칸
측면 칸수 2칸
소유자 밀양박씨 국담공파 종중
관리자 밀양박씨 국담공파 종중

[정의]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에 있는 밀양박씨 박수춘을 기리기 위한 조선 후기 재실.

[개설]

국담재(菊潭齋)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충절을 다하고 학문 진작과 후진 양성에 심혈을 바친 국담(菊潭) 박수춘(朴壽春)[1572~1652]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재실이다.

박수춘은 행산공파 파조 박세균(朴世均)의 9세손이고 안국암(安國巖) 박대성(朴大成)[1503~1572]의 손자이다. 아버지 무진재(無盡齋) 박신(朴愼)[1529~1593]에게서 가학을 전수받은 박수춘임진왜란에 이어 병자호란 때 창의하였으나 삼전도의 굴욕 소식을 듣고는 밀양 풍각현[현 청도군] 남산에 은거하고는 숭정처사(崇禎處士)라 자처하였다. 또 남산에 집을 지어 뜰에는 국화를 심고 못에는 연꽃을 심어 국담재사(菊潭齋舍)라 칭하였다.

그 후 큰아들 박유(朴瑠)가 풍각에서 본향인 밀양 부북면 후사포리 내곡마을로 돌아와 살면서 사우(祠宇)와 재숙소 명궁재(明宮齋)를 건립하였다. 1672년(현종 13) 손자 박진한(朴振翰)이 충청병사가 되자 통정대부 호조참의에 증직되었다. 풍각의 국담재사 유허(遺墟)에는 남강사(南岡祠)를 건립하여 국담공을 향사하였다.

이후 박유의 후손들은 명궁재를 개수하여 ‘국담재사’라고 편액을 고쳤고, 300여 년이 지난 1978년 주손 박재인(朴載仁)이 종중의 논의를 수합하여 기존의 낡은 재사를 허물고 새로 중창한 뒤 ‘국담재’ 편액을 문미에 내걸었다. 정문[외삼문]의 이름은 경돈문(敬敦門)이다. 재실 내벽에는 류석우(柳奭佑)의 「중수상량문」[1978]과 이국원(李國源)의 「중수기」[1978]를 비롯하여 정구, 조정, 이원익, 이덕형, 정경세, 안숙, 손기양 등의 시판이 걸려 있다.

[위치]

국담재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 440번지에 있다. 예림서원이 있는 송포로를 따라 북쪽 제대리를 가는 중간 지점 왼쪽에 후사포1길이 이어지는데, ‘국담재’ 표지석을 끼고 왼쪽으로 50m쯤 올라가면 나온다.

[변천]

국담재박수춘의 큰아들 박유가 청도 풍각에서 밀양 후사포리로 환거하여 사당과 재실 명궁재를 함께 창건하였고, 후손들이 명궁재를 개수하면서 ‘국담재사’로 편액을 고쳤다. 재실 건립 이래 수차례 보수하였으나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건물이 오래되어 퇴락하자 주손 박재인이 1978년 중창하였고, 1980년 사당을 중수하였다.

[형태]

국담재 왼쪽 뒤에 정면 3칸 측면 1칸의 사당이 있고, 풍우를 막기 위하여 국담재 기둥과 기둥 사이에 유리문을 설치하였다.

[현황]

국담재 옆의 가옥에서 13대 종손이 거주하며 상시 관리하고 있어 건물의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의의와 평가]

국담재를 통하여 임진왜란 때 경상남도 밀양 사족의 대응 양상과 밀양박씨의 지역 내 거주지 분포를 알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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