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2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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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德陽祠 |
이칭/별칭 | 덕양재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귀명1길 20[귀명리 27]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하강진 |
건립 시기/일시 | 1834년 - 덕양사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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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철|철거 시기/일시 | 1868년 - 덕양사 훼철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83년 - 덕양사 중건 |
현 소재지 | 덕양사 -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귀명1길 20[귀명리 27] |
성격 | 사당 |
양식 | 목조 |
정면 칸수 | 5칸 |
측면 칸수 | 2칸 |
소유자 | 광주김씨 양무공파 밀양문중 |
관리자 | 광주김씨 양무공파 밀양문중 |
[정의]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귀명리에 있는 광주김씨 김수인을 추모하는 조선 후기 사당.
[개설]
덕양사(德陽祠)는 광주김씨 구봉(九峯) 김수인(金守訒)[1563~1626]의 절의와 학문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한 불천위(不遷位) 사당이다.
김수인은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의 문인으로 성균관에 있던 중 영창대군이 1613년 강화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는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광해군이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는 의론을 홀로 주장하였다. 하지만 유생들이 기회만 엿볼 뿐 호응하지 않자 「전은소(全恩疏)」를 올린 뒤 비답이 없자 낙향하였다. 경상남도 밀양시 상남면과 하남면 사이에 있는 호수 국농호(國農湖)를 소요하고 시문을 지으면서 울분을 삭였다. 인종반정 후 복귀하여 성균관재임으로 있던 중 사망하였다.
덕양사는 1834년 사림의 공의에 따라 임진왜란 때 빼어난 전과를 거둔 당숙 양무공(襄武公) 김태허(金太虛)[1555~1620]와 함께 불천위로 향사하는 사묘(私廟)로 창건되었으나 1868년 서원철폐령에 따라 강당 현판을 ‘덕양재(德陽齋)’로 고쳤다. 그때 김수인은 귀명동 자택에 가묘(家廟) 명명사(明明祠)를 지어 봉안하였고, 김태허는 대사동 대학당(大學堂) 뒤에 별묘를 지어 위패를 봉안하였다. 이후 입향조 이하 3대를 위한 묘제(墓祭)의 재숙소로 사용하는 덕양재를 건립한 뒤 1983년 재실 뒤쪽에 별묘를 지어 옛 이름 ‘명명사(明明祠)’를 다시 내걸었다. 사당에 봉안된 위패는 김수인, 부인 여흥민씨와 팔계정씨 세 신위(神位)이다.
재실 내벽에는 한성좌윤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 이정병(李鼎秉)[1759~1834]의 「덕양사 상량문」과 대사간 정재 류치명(柳致明)[1777~1861]의 「봉안문」이 걸려 있다. 정문[외삼문] 이름은 ‘명륜문(明倫門)’이다. 별묘에는 김태허와 부인 부여백씨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위치]
덕양사는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귀명리 27번지에 있다. 귀명저수지 북쪽 양명길을 따라 마을 안으로 200m쯤 들어가면 덕양사가 나온다.
[변천]
덕양사는 1834년 건립된 이후 1868년 훼철되었다가 1983년 후손들의 노력으로 중건되었다.
[형태]
덕양사는 목조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황]
덕양사는 광주김씨 문중에서 마을 유사를 정하여 관리하고 있어 건물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의의와 평가]
덕양사를 통하여 광주김씨의 경상남도 밀양 하남 정착 과정과 지역 내 분포지, 광해군 때 밀양 지식인의 대응 양상을 파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