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20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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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來復齋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산외면 금곡1길 3[금곡리 279]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하강진 |
[정의]
경상남도 밀양시 산외면 금곡리 본촌에 있는 양성이씨 입향조를 기리기 위한 재실.
[개설]
양성이씨 후손들은 경상남도 밀양시 입향조 추담 이계택(李繼宅)[1722~1807]을 추모하기 위하여 1973년 봄 마을 서당을 매입하여 내복재(來復齋)라 하고 재실로 활용하였다. 이계택은 송나라에서 귀화하여 고려 문종 때 삼중대광보국에 이른 양성군(陽城君) 이수광(李秀匡)의 19세손이다. 1753년(영조 29) 경상북도 도주[현 청도]에서 산외면 금곡리 본촌에 터를 잡아 은거하며 자제들을 가르쳐 200여 년 동안 후손들의 세거지가 되었다. 당시 서당을 수리하여 정당으로 삼아 내복재라 명명하였다. 내복재는 손님을 맞이하는 장소로 활용하기 위하여 맞은편에 행랑채와 문간 각 3칸을 세워 이름을 주역의 괘사에서 따와 붕래실(朋來室)과 이왕문(利迬門)이라 불렀다.
금주 허채(許埰)[1859~1935]의 손자 호석 허섭(許涉)은 1973년 10월 지은 기문에서 “이씨가 오래도록 굽혀서 막혔다가 이렇게 떨쳐 드러남이 있음은 또한 복(復)의 도리이다.”라고 하였다. 내복재 정당과 정문 편액은 수암 안병목(安秉穆)[1906~1985]이 썼다. 허섭의 「내복재기」와 함께 걸린 내벽의 「내복재 중건기」[2003]는 벽사 이우성(李佑成)이 짓고, 청아 신용옥(辛容玉)이 글씨를 썼다.
[위치]
내복재는 밀양시 산외면 금곡리 279번지에 있다. 표충사 방면의 밀양대로를 가다 보면 왼쪽에 있는 금곡리에서 쉽게 눈에 띈다. 근처에 밀양시립요양원이 있다.
[변천]
내복재는 양성이씨 후손들이 1973년 마을 서당을 매입하여 수리한 뒤 재실로 활용하였다. 30년이 지난 뒤 낡고 공간이 협소하여 후손 밀양시장 이상조(李相兆)가 주축이 되어 2003년 건물을 완전 해체하고 같은 자리에 신축 확장하였다. 건물명과 정문 이름은 예전 그대로 유지하였다.
[형태]
내복재는 팔작지붕의 정당 내복재와 행랑채 붕래실이 ‘⌐’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 정당인 내복재는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이루어져 있고, 행랑채인 붕래실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황]
내복재는 2003년 신축 확장한 건물로 후손들이 잘 보존하여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의의와 평가]
내복재를 통하여 양성이씨의 경상남도 밀양 정착과 조선 후기 밀양 향촌 사회의 동향을 파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