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024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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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而絢-朴永緖旌閭 |
영어의미역 | Jeongnyeo for Bak Ihyeon and Bak Yeongseo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광석면 왕전리 마두마을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조성진 |
[정의]
충청남도 논산시 광석면 왕전리 마두마을에 있는 조선 중기 박이현과 박영서 부자의 정려.
[개설]
박이현·박영서 정려는 1689년(숙종 15) 명정을 받았다. 박이현의 본관은 순천이고, 자는 여수(汝粹)이며, 참봉 대영(大榮)의 아들이다. 남명 조식과 덕계 오건에게서 학문을 익혔다. 임진왜란 때에 의병을 일으켜 김면(金沔)의 막하에서 동지들을 모아 고향에서 진을 치고 호남의 고경명 등과 연계하여 성주의 가천과 무주 등지에서 공을 세웠으나, 대표평에 이르러 전사하였다. 후에 공조참의에 추증되었고, 공조판서가 가증되었으며, 의민(毅愍)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성주 덕봉사(德峰祠)에 제향되었다.
박영서는 무신으로 자는 효원(孝源)이고, 박이현의 아들이다. 무과 급제 후에 1620년(광해군 12) 옥구현감을 거쳐 창성부사가 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선봉장으로서 남이흥(南以興), 정충신(鄭忠信) 등과 함께 난을 토벌하였다. 황주의 신교에서 반군과 싸우다 포로가 되었는데, 박영서는 이괄을 보고 “조정이 너를 부원군에 봉하고 부원수를 시켰는데 무엇이 부족하여 배반하였느냐.”고 꾸짖었다.
이때 이괄과 한명련(韓明璉)이 그의 용기를 아껴 백방으로 회유하였으나 굴하지 않다가 살해되었다. 반란이 평정되자 인조는 박영서의 충성을 가상히 여겨 병조참판에 추증하였다. 다시 영조 대에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충장(忠壯)이란 시호가 내려졌으며, 수륜의 덕봉사와 순천 세덕사에 제향되었다. 무덤은 성주 수륜면 수륜리에 있다.
[형태]
박이현·박영서 정려는 정면 2칸, 측면 1칸의 규모이며, 맞배지붕에 도리식으로 가구하였다. 여섯 개의 초석 위에 둥근 기둥을 세운 뒤 창방으로 짜 돌렸다. 이밖에 사면은 홍살로 시설하였고, 처마는 홑처마이며, 측면에는 방풍판을 설치하였다. 정려의 안에는 두 개의 명정 현판이 있으며, 측면 상단에는 「박공양세충신문중수기(朴公兩世忠臣門重修記)」가 걸려 있다.
박이현의 명정 현판에는 ‘무신팔월증시충신증자헌대부공조판서겸지의금부사시의민공박이현지문숭정후기사이월립(戊申八月贈諡忠臣贈資憲大夫工曹判書兼知義禁府事諡毅愍公朴而絢之門崇禎後己巳二月立)’이라 쓰여 있다. 박영서의 명정 현판에는 ‘무신팔월증시충신증자헌대부병조판서겸지의금부훈련원사행통정대부창성도호부사창성진병마첨절제사시충장공박영서지문숭정후기사이월립(戊申八月贈諡忠臣贈資憲大夫兵曹判書兼知義禁府訓練院事行通政大夫昌城都護府使昌城鎭兵馬僉節制使諡忠壯公朴永緖之門崇禎後己巳二月立)’이라 쓰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