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027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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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黃山-戰鬪-千決死隊 |
영어의미역 | Hwangsanbeol Battle and 5 Thousand Suicide Detachments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
시대 | 고대/삼국 시대/백제 |
집필자 | 강종원 |
[개설]
황산벌전투는 백제의 계백 장군이 이끄는 5천 결사대와 신라의 김유신 장군이 이끄는 5만 군이 충청남도 논산의 황산벌에서 660년 7월 9일부터 7월 10까지 2일간에 걸쳐 벌인 전투를 말한다. 황산벌 전투는 비록 패배한 전투였지만, 다른 어떤 전투보다도 한국전쟁 역사상 커다란 의미를 지니며 후세에 귀감이 되고 있다.
[혼란했던 백제 말기의 정치 상황]
백제 말기의 정치 상황은 대부분의 고위 관료들이 자신의 안위와 정치적 출세를 위해 의자왕에게 아첨을 하며, 국익과는 배치되는 행동을 일삼았다. 의자왕은 신하의 충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아첨하는 말을 따랐다. 의자왕의 실정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 성충(成忠)이 656년(의자왕 16) 3월 목숨을 걸고 왕에게 극간(極諫)을 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당시 상황을 “좌평 성충이 극간하니, 왕이 노하여 옥중에 가두었다. 이로 인하여 감히 간하는 자가 없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국가를 위해 충성을 다한 세력도 있었지만, 현직에 있었던 다수의 세력들은 국가의 안위보다는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과 일신상의 영리를 위해 국가 안위를 저해하거나 정치 세력 간의 갈등을 조장하였던 것이다.
내부적으로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는 가운데 대외적으로 백제는 당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고구려와 연계하여 신라를 압박하고 있었다. 이에 신라는 당과 연계하여 국제적 정세에 대응하고자 하였다. 마침 당에서는 고구려의 침략이 실패하면서 새로운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었으며, 이에 신라의 요청을 받아들여 백제에 대한 공략에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백제는 이와 같은 국제 정세를 간파하지 못함으로써 결국 나당연합군의 침략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충의와 관용 정신이 배어 있는 황산벌전투]
논산 지역이 백제사에서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점은 바로 이곳에서 백제 역사상 최대의 격전이자 국운을 걸었던 황산벌전투가 벌어졌다는 사실 때문이다. 황산벌 전투와 관련해서는 삼영(三營)의 설치 지점과 전투 지역의 위치, 계백의 충의 정신 등에 대한 검토가 주로 이루어져 왔는데, 전투 지역이 논산의 연산 일대라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황산벌전투의 전개 상황은 『삼국사기』 계백전보다는 오히려 신라측의 기록을 통해 보다 상세하게 접할 수 있다. 이들 사료 가운데 가장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삼국사기』 태종무열왕 7년조이며, 이 외에 『삼국사기』 권47 열전7 김영윤전과 관창전에도 일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황산벌에서의 전투는 계백이 이끄는 백제의 5천 군사가 먼저 황산벌에 도착하여 삼영을 설치한 이후, 7월 9일 이곳에 도착한 신라군이 군을 삼도(三道)로 나누어 백제군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신라측은 초전에 네 번을 싸워 모두 패배하였으며, 사졸(士卒)이 모두 지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는 계백이 이끄는 5천 결사대가 신라 5만 군을 상대하여 매우 효과적이면서 강력한 대응을 했음을 보여준다.
신라는 전황이 불리하자 반굴과 관창 같은 나이 어린 화랑들을 동원하여 군사의 사기를 돋우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계백은 관창을 사로잡았으나 어린 나이와 용맹함에 감탄하여 그를 살려 보내주었으며, 재차 잡혔을 때에는 부득이 목을 베어 돌려보냈다. 젊은 화랑들의 죽음을 무릅쓴 분투에 사기가 오른 신라군을 맞아 결국 백제군은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배하게 되었으며, 계백은 전사하고 좌평 충상, 상영 등 20여 명은 사로잡혔다.
황산벌전투가 벌어졌던 황산벌은 지금의 연산면 신량리 일대의 ‘황산벌’이며, 계백의 5천 결사대가 군영을 세웠던 삼영은 이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산직리 산성, 모촌리 산성, 황령산성 등에 비정되고 있다. 이 외에도 주변에는 청동리 산성을 비롯하여 황산성 등 백제시대 산성이 위치하고 있어, 당시 연산 지역의 군사지리적 중요성을 알 수 있다.
황산벌전투의 패배로 백제는 당군과 연합한 신라군에 의해 결국 사비도성을 함락당하게 되었다. 사비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이 항복함에 따라 백제는 일시적으로 당의 행정구역으로 편제되었는데, 당은 백제 고지(故地)를 지배하기 위해 5도독부를 세웠다. 이 가운데 하나를 동방의 치소였던 덕안성에 두었는데, 덕안성은 득안성(得安城)으로, 지금의 논산 은진에 비정된다. 이들 행정구역에는 각각의 주현(州縣)을 편제시켰으며, 도독·자사·현령을 두어 통치하도록 하였다.
[5천 결사대의 성격과 계백의 신분]
황산벌전투가 지닌 의미는 단지 이곳이 전쟁터였다는 점에 한정되지 않는다. 신라군이 진격로로 택한 곳은 동방성인 득안성이 위치하고 있는 지역이었는데, 백제는 신라군을 방어하기 위해 이곳 소속의 각 군사력을 징발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각 방의 방령은 700~1,200명의 상비군을 거느리고 있었다. 여기에 각 군과 성에 소속된 군사력을 편제할 경우 5천 정도의 병력을 확보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특히 주요 거점 성에는 일정한 상비병이 진수하고 있었는데, 비상시 이들 대부분이 동원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황산벌전투에는 논산 일대의 군사력이 대부분 참여하였을 것으로 생각되며, 그들은 기꺼이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것이다.
황산벌전투에서 동방성의 방군(方軍)이 동원되었을 가능성은 사비기에 방군이 중앙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대외전쟁에 참여하고 있었다는 점을 통해서도 추정해볼 수 있다. 대외전쟁에서 방군이 동원된 예는 성왕대 신라와의 전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전투를 총지휘한 태자 여창은 미리 동방령을 보내 신라 함산성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다. 이를 통해 동방성 소속의 방군은 대신라 전쟁 시 우선적으로 동원되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계백이 거느리고 출전한 5천 결사대는 일부 중앙군도 포함되었겠지만, 대부분 동방령 관할의 상비군으로 편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한다면 황산벌전투에 참여한 5천 결사대의 구성원에는 실제 논산 지역 군사력이 다수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황산벌전투와 관련하여 5천 결사대를 지휘한 책임자가 과연 계백이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논의가 분분하다. 『삼국사기』열전 관창전에서는 계백을 백제 ‘원수(元帥)’로 기록하고 있으나, 실제 전쟁에 참여한 인물을 보면 계백보다 관등이 높은 좌평 충상과 상영의 존재가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등이 낮은 계백이 총지휘권자가 될 수 있었겠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좌평 충상을 최고사령관으로 보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계백이 동방의 방령이었으며, 그가 거느리고 출정한 군사들이 동방 소속이었다고 한다면 지휘권자도 당연히 계백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계백은 의자왕으로부터 신임이 두터웠으며 군사적 재능도 탁월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뿐만 아니라 관창전의 내용을 보면 계백을 원수로 칭하고 있으며, 관창이 사로잡혔을 때 그를 살려 돌려보내고 있는 사실은 그가 이 전투에서 의사결정권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전쟁 시 최고사령관에게 주어지는 편의종사권(便宜從事權)의 한 예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황산벌전투에서 백제 5천 결사대를 지휘한 총사령관을 계백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겠다.
황산벌전투는 백제의 입장에서는 나·당군의 연합 작전을 저지시키고, 궁극적으로는 신라의 백제 정벌 의도를 분쇄시킬 수 있는 전투였다. 비록 군사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함으로써 백제가 멸망의 운명을 맞게 되었지만, 국가와 함께 운명을 같이하고자 한 계백과 5천 결사대의 충의정신은 후세의 귀감이 되고 있다.
[가족의 희생을 통해 군사의 의기를 돋우다]
특히 계백은 출전에 앞서 가족을 모두 죽임으로써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 『삼국사기』 계백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계백(階伯)이 장군이 되어 결사대 5천 명을 뽑아 막으며 말하기를 ‘한 나라의 인력으로 당과 신라의 대병을 대하니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다. 내 처자가 잡혀 노비가 될지도 모르니, 살아서 욕을 보는 것보다 죽어서 쾌(快)함만 같지 못하다.’ 하고 가족을 다 죽이고는 황산들에 나와 세 곳에 진영을 쳤다. 신라 군사와 만나 싸우게 되어서는 여러 사람들과 맹세하기를 ‘옛날 구천(句踐: 월의 임금)은 5천 명으로 오의 70만 군사를 무찔렀다. 오늘은 모두 다 분려결승(奮勵決勝)하여 국은에 보답하자.’ 하고 결의함으로써, 한 명이 천 명의 적을 당해내는 격이어서 신라병이 그만 물러갔다. 이렇게 진퇴하기를 네 차례나 하였으나 힘이 모자라 죽었다.”
계백은 가족들이 적에게 잡혀 욕되게 살아갈 것을 염려하여 모두 죽이고 전쟁에 임하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로 인해 계백의 행위를 싸워보지도 않고 패할 것을 미리 생각하였다는 비판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황산벌전투가 갖는 중요성을 생각할 때 이러한 비판은 무의미해진다. 황산벌전투는 신라 주력군과의 최초의 전투일 뿐만 아니라 신라와 당의 연합 작전을 저지할 수 있는 절대절명의 싸움이었다. 따라서 계백은 출전에 앞서 전쟁에 임하는 병사들에게 결연한 의지를 보여야 했으며, 결국 가족을 죽이는 것으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당시 백제의 정국을 보면 좌평 임자와 같은 인물은 김유신과 내통하여 일신의 안위를 꾀하였으며, 많은 귀족 세력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성충과 흥수 같은 충신들의 충언을 무시해버리는 혼란한 상황이었다. 이와 같이 국가와 왕에 대한 충성심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이를 반전시키고 병사들의 충성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지휘자의 보다 강력한 의지 표출이 필요하였다. 그로 인해 계백이 출전에 앞서 가족을 모두 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계백의 행위는 국가의 안위와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황산벌전투에 임해서 백제가 네 차례의 승리를 거둔 것은 그의 뛰어난 군사적 재능뿐만 아니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의지에 의해 가능하였다. 결국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배하였으나 많은 장수들이 항복하는 와중에 계백은 5천 결사대와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현재 황산벌전투가 벌어졌던 논산 일대에는 이와 관련된 많은 설화와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데, 당시의 치열했던 전쟁 상황을 말해주는 자료들이라고 하겠다. 특히 부적면 충곡리에는 계백 장군이 전사한 곳이라 하여 수락산(首落山) 또는 충혼산(忠魂山), 충훈산(忠勳山) 등으로 불리는 산이 있다. 또 계백을 주향으로 모시는 충곡서원(忠谷書院)이 있어서 백제시대 역사의 현장임을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황산벌전투가 벌어진 오늘날의 연산 지역은 백제시대 구국의 혼이 서려 있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황산벌전투가 갖는 역사적 의미]
황산벌전투는 백제가 나·당군에 대항하여 벌인 최초의 전투이자 사비도성(泗沘都城)을 방어하기 위한 최후 전선이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전투였다. 그리고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이 이끄는 5천 결사대가 패배함으로써 결국 백제는 멸망의 운명을 맞게 되었다. 또한 황산벌전투는 진정한 충의정신과 관용정신을 보여준 전투였다. 계백 장군이 높이 평가되는 것은 단지 전투에서 목숨을 바쳤다는 사실에 한정되지 않는다.
계백은 국운을 건 전투였지만 도의(道義)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지 않았는데, 비록 적국의 장수였지만 사로잡은 관창을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돌려보낸 것이 그것이다. 국가의 존망을 결정짓는 중요한 전투였지만 계백은 진정한 충의 가치를 인식하고 관용을 베풀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계백이 국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하면서도 타인에게는 관용을 베풀 수 있었던 것은 절대 가치를 중시하는 정신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계백의 정신이 높이 평가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