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11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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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溆 |
이칭/별칭 | 징지(徵之)/옥동(玉洞)/옥금산인(玉琴散人)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전병무 |
출생 시기/일시 | 1662년 - 이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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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이서 묘소 - 경기도 포천시 포천동 |
성격 | 서예가 |
성별 | 남 |
본관 | 여주(驪州) |
[정의]
조선 후기 포천에서 활동한 서예가.
[가계]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징지(徵之), 호는 옥동(玉洞)·옥금산인(玉琴散人). 증조할아버지는 좌찬성 이상의(李尙毅)이고, 할아버지는 이지안(李志安)이다. 아버지는 대사헌 이하진(李夏鎭)이다. 5형제 중 셋째이며, 성호 이익(李瀷)이 동생이다.
[활동 사항]
이서(李漵)[1662~?]는 1662년에 이하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삼촌 이주진의 양자로 갔다. 군내면 청량포에서 거주하였다. 북인(北人)이었던 이서의 집안은 인조반정으로 몰락한 후 남인(南人)으로 전향하였다.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던 이서는 1694년(숙종 20), 당시 좌의정이었던 박세채(朴世采)의 천거로 기린도 찰방(麒麟道察訪)에 제수되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향촌에서 은거하였다. 이서는 글씨를 잘 썼는데, 진체(眞體)의 필법을 따르지 않고 스스로의 필법을 계발하였다. 『성재집(性齋集)』에서 이르기를 “동국(東國)의 진체는 옥동에서 비롯되었다.”라고 하였다.
[묘소]
경기도 포천시 포천동 왕방산에 묘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