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7002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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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孟芳埋香 |
영어공식명칭 | Maengbang Maehyang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의례/제 |
지역 | 강원도 삼척시 |
시대 | 고려 |
집필자 | 배재홍 |
[정의]
고려 말 삼척 맹방 지역에서 행하여진 매향 의식.
[개설]
1309년 8월 삼척 근덕면 맹방 바닷가에 250그루의 향나무를 묻었다. 당시 매향은 삼척 맹방뿐만 아니라 강릉도 산하 여러 고을 바닷가에서 동시에 행해졌다. 매향 주도 계층은 강릉도 존무사 김천호를 비롯하여 강릉도 산하 9개 지방 지방관들이었다. 이들은 매향 의식으로 서원을 밝히고 미륵이 하생하기를 기원하였다.
[매향이란]
매향(埋香)은 말 그대로 향나무를 땅에 묻는 것을 말한다. 현존하는 매향비에 따르면 매향은 모두 14~15세기, 즉 고려 말 조선 초 해안 지역에서 행해졌다. 이때 행해진 매향은 단순히 침향(沈香)을 분향 의식 용품이나 약재·각불재(刻佛材) 등으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민간신앙, 즉 미륵하생 신앙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즉 매침(埋沈)한 향을 매개로 하여 발원자(發願者)와 하생(下生)할 미륵이 연결되기를 기원하며 매향 의식을 행한 것이었다. 이처럼 매향은 미륵 하생 신앙과 직결된 하나의 민간신앙 의식 형태였다.
고려 말 조선 초는 왜구의 창궐로 해안 지역 주민들이 불안에 떨고 위기감을 느끼던 시기였다. 이 때문에 바닷가 주민들은 이러한 현실에서의 고통과 불안감으로부터 구원받는 방법으로 미륵하생 신앙과 접합된 매향을 택하였다. 주민들은 매향의 결과 얻은 침향을 매개로 하생할 미륵과 만나고, 미륵이 주관하는 용화회(龍華會)에 참여하여 미륵이 거주하는 처소인 내원궁(內院宮)에 함께 들어감으로써 결국 왜구 침입으로 야기된 불안과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염원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서 매향의 최적지는 산곡수(山谷水)와 해수(海水)가 만나는 지점이었다. 당시 해안 지역 주민들이 왜구 침입으로 말미암아 겪는 고통과 불안감이 내륙 지방보다 더 심각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또 고려 말 조선 초에 매향을 주도한 집단이나 조직은 지방관, 보(寶), 결계(結契), 향도(香徒) 등이었다. 여기에 승려와 지방민들이 참여하였다. 그러나 매향은 어느 한 계층이나 조직이 주도하였다기보다는 여러 계층 조직의 연계에 의하여 행해졌다.
[맹방 매향]
매향 의식은 고려 말에 삼척 지역에서도 행해졌다. 1309년(충선왕 복귀 1) 8월 근덕면 맹방(孟方) 바닷가에 250그루의 향나무를 묻었다. 이때의 매향은 삼척 맹방뿐만 아니라 강릉도(江陵道) 산하 여러 바닷가 지역에서 동시에 행해졌다. 당시 강릉도 소속 여러 군·현들이 거도(擧道) 차원에서 공동으로 매향 의식을 행한 것으로 보인다.
[매향 지점과 주수(株數)]
1309년에 매향을 한 후 공동으로 건립한 고성 삼일포 매향비에서 각 지역의 매향 지점과 향나무 그루 수를 보면 평해 해안 동굴에 1000그루, 삼척 맹방 바닷가에 250그루, 강릉 정동(正東)에 310그루, 양양덕산망(德山望)에 200그루, 동산현 문사(文四) 바닷가에 200그루, 간성공수진(公須津)에 110그루, 흡곡 단말리(短末里)에 110그루, 압계현학포구(鶴浦口)에 120그루 등 8개 지점에 총 2300그루의 향나무를 묻었다. 이처럼 당시 매향 지점은 모두 바닷가였음을 알 수 있다. 삼척의 매향 지점인 맹방 바닷가는 매향의 최적지를 감안할 때 마읍천(麻邑川)이 바닷물과 만나는 덕봉산(德峰山) 부근일 가능성이 짙다.
[매향 참여 계층]
1309년 매향에서 의식을 주도한 계층은 강릉도 존무사 김천호(金天皓)를 중심으로 한 강릉도 산하 9개 지방의 지방관들이었다. 매향에 참여한 지방관은 지강릉부사, 강릉 판관, 양주 부사, 화주 부사, 통주 부사, 흡곡 현령, 간성 현령, 삼척 현위, 울진 현령, 정선 감무 등이었다. 당시 삼척 현위는 조신주(趙臣柱)였다. 이들은 매향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전답을 장등보(長燈寶)에 시납(施納)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지방관이 매향에 적극 참여한 것은 다른 지역의 매향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또 매향에 특정 지역만이 아닌 9개 군·현이 공동으로 협력·참여한 것도 이례라 할 수 있다.
당시 매향 의식에는 이들 지방관 이외에도 승려 지여(知如)를 비롯하여 각계 각층의 주민들이 적극 참여하였다. 장등보는 당시 미륵불을 공양하던 민간신앙 조직 또는 재단으로 보이고, 지방관과 함께 매향 의식에서 주도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승려 지여는 이 장등보의 대표자로 추정되는 가운데 지방관과 각계 각층의 주민들을 연결시킨 주인공으로 추측된다. 이들은 매향을 통하여 서원(誓願)을 밝히고 미륵이 하생하기를 기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