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10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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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康性益 |
이칭/별칭 | 기삼(箕三),남주(南州) |
분야 | 문화·교육/교육,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법환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규복 |
출생 시기/일시 | 1892년 - 강성익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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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28년 - 강성익 제주남부운수주식회사 창립 |
활동 시기/일시 | 1953년 - 강성익 남제주군 군수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956년 - 강성익 남주고등학교 초대 이사장 취임 |
활동 시기/일시 | 1960년 - 강성익 제주도지사 당선됨 |
활동 시기/일시 | 1961년 - 강성익 5·16쿠데타로 제주도지사직 상실 |
몰년 시기/일시 | 1968년 12월 - 강성익 사망 |
출생지 | 강성익 출생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법환동 |
활동지 | 남주고등학교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로 303번길 |
성격 | 사업가|정치인 |
성별 | 남 |
본관 | 신천 |
대표 경력 | 제주도지사, 남주학원 이사장 |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법환동 출신의 기업가·정치인.
[가계]
본관은 신천. 자는 기삼, 호는 남주이며 서귀포시 법환동에서 출생하였다.
[활동 사항]
강성익(康性益)은 1918년 26세에 서귀포 부두에서 일본인들과 경쟁하면서 단추공장을 설립하였다. 단추공장사업으로 영업이익이 증가하면서 축적된 자본을 기반으로 1926년 서귀포-모슬포간과 서귀포-성산포간을 동시에 운행하는 남부자동차회사를 서귀포에 설립하였다.
강성익은 교통사업이 번창함에 따라 여객 외에 화물운송까지 전담하는 등 운송업계의 실력자로 급성장하기 시작하였고, 그의 재력은 1942년 4월 서귀포상공회의소 소장에 피선될 당시 산남 제1의 위치를 굳히고 있었다. 1946년 강성익은 제주자동차를 인수하여 사장이 되었다.
1950년 5월 제5대 남제주군수로 임명되었으며 취임한지 1개월 만에 6·25전쟁이 일어났다. 제주4·3사건이 계속되면서 극도의 식량난에 허덕이는 피난민과 제주도민의 구호에 많은 노력을 하였다. 또한 가산(家産)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인 군민들에게 양곡을 나누어 주기도 하고, 가난으로 진학하기 힘든 학생들에게 돈을 대주어 공부할 수 있도록 하기도 하였다.
그 후 강성익은 정계에 진출하고자 하였으나 1954년 3대 국회의원 선거와 1958년 4대 국회의원 선거,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연거푸 낙선하였다. 그러나 강성익은 1960년 12월 29일 무소속 후보로 초대 민선 제주도지사로 당선되면서 ‘대제주건설(大濟州建設)’을 도정지표로 내걸어 지역개발사업에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1961년 5·16군사쿠데타로 인해 도지사직을 5개월 만에 그만두게 되었다.
강성익은 정치참여 뿐만 아니라 제주도를 대표하는 기업가로써 지역사회에도 많은 공헌을 하였다. 1920년대 서귀포초등학교를 설립할 당시 많은 부지를 기부하였고 서귀포시 토평동에 있는 제주대학교 식물원의 부지도 기증하였다.
1956년에는 남주학원을 설립하였다. 당시 서귀포 일대에는 제주시의 높은 교육열과는 달리 중등교육이 크게 뒤져있었다. 서귀포에는 실업계인 서귀농업고등학교만 있었기 때문에 서귀포 지역 학생들이 인문계고등학교에 진학하는데 많은 문제가 있었다. 이에 강성익은 법환리에 있는 3천 평의 토지를 처분하고 그밖에 토지와 현금 등을 동원하여 1억 5천만원에 달하는 학교설립 기금을 마련하였다. 그 후 1954년 학교설립을 준비하였고 1955년 4월 서귀포시 동홍동 291-3번지에 3천2백 평의 부지를 마련하고 이듬해 2월 재단법인 남주학원을 정식으로 인가받아 7월에 남주고등학교를 개교하였다. 그 후 남주학원은 1966년 2월 학교법인으로 변경되어 12월에 남주중학교가 병설되었다.
남주학원을 설립하고 기반을 다진 강성익은 1968년 12월에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