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704
한자 李震相
영어공식명칭 I Jinsang
이칭/별칭 여뢰(汝雷),한주(寒洲),산교(汕嶠),동교(東嶠),정와(定窩),조운헌도재(祖雲憲陶齋),운도재(雲陶齋)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세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18년연표보기 - 이진상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49년 - 이진상 증광 생원시에 합격
몰년 시기/일시 1886년연표보기 - 이진상 사망
추모 시기/일시 1897년 - 이진상 성주 삼봉서당 제향
출생지 이진상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이진상 거주지 -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묘소|단소 이진상 묘소 -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사당|배향지 성주 삼봉서당 -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주산로 236-152[대산리 914-3]지도보기
성격 성리학자
성별
본관 성산

[정의]

조선 후기 성주 출신의 대표적인 성리학자.

[가계]

본관은 성산(星山)[성주]. 자(字)는 여뢰(汝雷), 호는 한주(寒洲), 산교(汕嶠), 동교(東嶠), 정와(定窩), 운도재(雲陶齋). 할아버지는 이형진(李亨鎭)[1772~1834], 아버지는 이원호(李源祜)[1790~1859]이고, 어머니는 의성 김씨 김종옥(金宗沃)이다.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1792~1871]의 장조카이고,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1777~1861]의 사촌 처남이다. 첫 번째 부인은 순천 박씨 박기진(朴基晉)의 딸로 1839년에 사별했고, 두 번째 부인은 흥양 이씨 이기항(李起恒)의 딸로 1840년에 재혼하여 슬하에 1남 5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이진상(李震相)[1818~1886]은 1818년(순조 18) 성주군 대포리(大浦里)[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한개 마을]에서 2남 4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원호와 숙부 이원조의 가학에 힘입어 초년에 여러 차례 초시(初試)에 합격했지만, 대과까지는 나아가지 않았다. 17세 때인 1834년에 성리학에 본격적으로 몰두하여, 이듬해 「성명도설(性命圖說)」을 지을 정도로 학문적 탁월함을 드러냈다.

20세 때인 1837년 도산서원에 배알한 후로 「성학도설(性學圖說)」, 「기삼백해(朞三百解)」, 「인도설(仁圖說)」, 「심경도설(心經圖說)」, 「야기잠(夜氣箴)」, 「명성잠(明誠箴)」, 「이단설(異端說)」 등을 20대에 다 지었다. 특히 1840년에 지은 「이단설」은 주기론(主氣論)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20대 후반에는 과거에 뜻을 두어 1844년 증광문과 초시에서 장원하고 대과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일원만수도(一原萬殊圖)」, 「성정심설(性情心說)」 등의 저술을 남겼다. 1849년[33세]에는 증광 생원시에 합격했고, 가을에는 「용구도(用九圖)」를 지었다. 이듬해 증광시에 장원하여 복시에 응했다가 숙부가 경주부윤으로 있으면서 어떤 사건에 연루되는 바람에 과거를 포기하고 낙향하여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30대에는 본격적으로 학문의 길로 접어들었고, 자신의 서실 편액을 ‘조운헌도재(祖雲憲陶齋)’[약칭 운도재]라 명명하였다. 운곡노인(雲谷老人) 주자(朱子)를 조술(祖述)하고 도산(陶山)에 살았던 퇴계를 본받겠다는 학문적 취지를 분명히 밝힌 것이었다. 이런 학문적 취지 표명을 출발점으로 하여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묘 배향을 청하는 상소를 지었고, 『직자심결(直字心訣)』, 「사칠변(四七辨)」, 「주자언론동이고변(朱子言論同異攷辨)」, 「남당집변(南塘集辨)」, 「곤지기변(困知記辨)」, 「대학차의(大學箚義)」, 「중용차의(中庸箚義)」, 「태극도차의(太極圖箚義)」, 「심자고증(心字考證)」, 「통서차의(通書箚義)」, 「근사록차의(近思錄箚義)」, 「이기동정설(理氣動靜說)」, 「성정집설(性情集說)」, 「지동기동변(志動氣動辨)」, 「주재도설(主宰圖說)」 등의 저술을 연이어 남겼다.

40대에는 운곡서원(雲谷書院)에서 『심경』 강학을 시작했고, 「독김농암사단칠정설(讀金農巖四端七情說)」을 지었다. 1859년 부친상을 당한 이후에도 「독례차의(讀禮箚疑)」, 「논어차의(論語箚義)」,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義)」, 「퇴계집차의(退溪集箚疑)」, 「임창게집사칠변(林滄溪集四七辨)」, 「임녹문집고변(任鹿門集攷辨)」, 「계몽차의(啓蒙箚義)」 등의 저술을 남겼다. 특히 1861년[44세] 겨울에는 「심즉리설(心卽理說)」을 내놓으며 ‘마음이 바로 이(理)라는 설’을 완성하였다. 이후 「맹자차의(孟子箚義)」, 『역학관규(易學管窺)』, 「삼역고(三易攷)」 등을 짓던 와중인 1864년에 모친상을 당했음에도 학문적 연속성을 놓지 않고 『사례집요(四禮輯要)』, 『묘충록(畝忠錄)』 등의 저술을 남겼다.

50대에는 회연(檜淵)서원에서 『대학』 강학을 시작하였다. 당시 이진상은 저술들을 편집하거나 교정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주목할 만한 교정 저술들로는 『청천당문집(聽天堂文集)』, 『주자서절요집해(朱子書節要輯解)』, 『응와집(凝窩集)』 등이 있고, 저술로는 58세 때인 1875년에 지은 『춘추집전(春秋集傳)』이 있다. 60세이던 1877년에는 『춘추익전(春秋翼傳)』, 『천고심형(千古心衡)』을 집필하며 「태극도설」을 강했으며, 이듬해에는 『중용』과 『근사록』을 강하고, 『이학종요(理學綜要)』를 지었다. 이어 『퇴휴집(退休集)』, 『역학관규』, 『이학종요』 등의 책들을 교감했고, 이전보다 더 자주 명승지를 찾았다. 67세 때인 1884년에는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교감 작업과 명승지 유람을 이어갔다.

1886년 10월 부인 흥양 이씨가 죽고 사흘 만에 6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이진상의 학문적 삶과 성과는 19세기 후반 주문팔현(洲門八賢)을 중심으로 하는 한주학파(寒洲學派)의 형성을 이끌었다.

[학문과 저술]

주요 저술은 문집으로 1895년 아들 이승희(李承熙)가 거창 정천(井泉) 원천정(原泉亭)에서 49권 25책으로 간행했고, 1928년 제향 공간인 삼봉서당(三峯書堂)에서 22책[원집 38권, 부록 5권]으로 개정하여 중간하였다. 문집 이외에도 『이학종요(理學綜要)』[1878] 22권 10책, 『사례집요(四禮輯要)』[1865] 16권 9책, 『묘충록(畝忠錄)』[1866] 4권 2책, 『춘추집전(春秋集傳)』[1912] 20권 10책, 『춘추익전(春秋翼傳)』[1877] 3권 3책, 『천고심형(千古心衡)』[1877] 상하권 2책, 『직자심결(直字心訣)』[1851] 상하권 1책, 『구지록(求志錄)』 23책, 『변지록(辨志錄)』 4책 등을 남겼다.

[묘소]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897년 3월 도산서원에 문집을 헌정했으나 반송되어 삼봉서원(三峯書院)[성주 삼봉서당,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을 낙성하고 제향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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