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8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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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呂弘淵 |
영어공식명칭 | Yeo Hongyeon |
이칭/별칭 | 진원(振源),제송(霽松)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출생 시기/일시 | 1879년 6월 13일 - 여홍연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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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8년 12월 8일 - 여홍연 대한협회 성주지회 찬의원으로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2일 - 여홍연 성주군 벽진면 해평동 월회당 앞 독립 만세 운동 주도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28일 - 여홍연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음 |
몰년 시기/일시 | 1939년 4월 15일 - 여홍연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83년 - 여홍연 대통령 표창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여홍연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여홍연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수촌리 |
거주|이주지 | 여홍연 거주지 -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수촌리 |
활동지 | 여홍연 활동지 -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수촌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진원(振源), 호는 제송(霽松). 아버지는 여임해(呂林會)이다.
[활동 사항]
여홍연(呂弘淵)[1879~1939]은 1879년 6월 13일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해평동(海平洞)[현 벽진면 수촌리] 943번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온아염결(溫雅廉潔)하고 재질(才質)이 뛰어났다. 한말 교관(敎官)으로 있다가 을사늑약 이후 직을 사임하고 귀향하였다. 1908년 11월 대한협회 성주지회가 설립된 뒤, 12월 8일 개최된 조직 총회에서 찬의원(贊議員)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김창숙(金昌淑) 등과 함께 대한협회 성주지회의 활동을 통해서 사회를 변혁하고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학에 조예(造詣)가 있고, 서도(書道)에 명망이 높아 사우(士友) 간에 추중(推重)을 받았다.
1919년 4월 2일 성주읍 장날 만세 시위에 참가하고 돌아온 여왕연(呂旺淵)·여우룡(呂又龍)으로부터 일경의 야만적인 발포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날 밤 11시 여우룡·여왕연·여호진(呂鎬鎭)·도무환(都武煥) 등과 함께 성주읍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돌아오는 군중 200여 명을 규합하여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해평동 월회당(月會堂) 앞 도로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밤늦도록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출동한 벽진주재소 순사들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군중들과 함께 밤늦도록 시위를 벌인 뒤 흩어졌다. 주동 인물 여우룡·여문회·여왕연·여호진·도무환 등과 함께 모두 6명이 검거되어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1919년 4월 2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공소를 제기하였다. 그러나 5월 2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공소가 기각되었으며, 다시 여왕연·여우룡·여문회 등과 함께 상고하였으나 6월 26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 외 여우룡과 여왕연은 각각 징역 8월, 여호진과 여문회는 각각 징역 6월, 도무환은 태(笞) 90도(度)에 처해졌다. 출옥 후 일제의 감시 대상으로 생활하다가 악형의 여독으로 1939년 4월 15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83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