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0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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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忠淸兵馬節度使-氣像-海美邑城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동문1길 36-1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해준 |
[정의]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서산 해미읍성에 설치되었던 조선 시대 충청병마절도사영(忠淸兵馬節都使營).
[개설]
조선 초기 충청병마도절제사영(忠淸兵馬都節制使營)은 원래 덕산(德山)에 설치되었다가, 왜구의 잦은 침략에 대한 방비와 서해안의 수호가 중요시되면서 1417년(태종 17) 이후 해미로 이설되었다. 해미로 옮겨진 이후, 충청병마절도사영으로 개칭되었고 1652년(효종 3) 청주로 옮겨가기 전까지 약 230여 년간 군사권을 행사하는 거점이 되었다. 이후 호서좌영성으로 축소되면서 해미읍성으로 불리게 되었고, 본래 이름은 해미내상성(內廂城)이다.
[해로와 밀접한 문화 지리적 위치]
서산 해미읍성이 자리한 서산시 해미면과 운산면 일대는 원래 고려~조선 전기까지 정해현(貞海縣)과 여미현(余美縣)이 각각 자리하였던 곳이다. 그런데 왜구로 인한 피해로 황폐화된 곳이 많아 두 고을을 합치고, 각 현의 명칭에서 한 글자씩을 따 해미현(海美縣)이라 이름 지었다.
해미는 그 이름처럼 바다를 끼고 있는 아름다운 고을이었다. 물론 지금은 모두 농지로 개간되어 바다와 멀어졌지만,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서산 해미읍성에 오르면 멀리 서해가 아름답게 펼쳐 보였다. 해미는 해안을 조망하며 내륙으로 들어가는 관문으로서 적합한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해미 지역은 이와 같은 입지적 특성상 고대에서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해로(海路)와 관련하여 문화 지리적으로 매우 주목받는 지역이었다. 특히 큰 바다에 연하지 않은데다가, 가야산을 병풍으로 삼은 천수만의 만입처에 안정적으로 자리 잡고 있어 천혜의 물산과 수로를 활용한 문화적 풍요를 누렸다. 서산시 운산면의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瑞山龍賢里磨崖如來三尊像)[국보 제84호]이나 서산 보원사지(瑞山普願寺址)[사적 제316호], 그리고 최근 금동관이 출토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서산 부장리 고분군(瑞山副長里古墳群)[사적 제475호] 등 내포 지역 고대 문화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다양한 문화 유적들이 분포하는 이유도 바로 이와 같은 지리적 조건에 기반하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해미 일대에는 백제 시대의 고분이나 성터 유적들이 곳곳에 산재하여, 고대로 올라갈수록 새로운 문화의 유입과 전파가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가 하면 고려 후기 및 조선 전기 선종(禪宗) 세력과 해상 세력의 관계, 법인국사(法印國師) 탄문(坦文)의 보원사(普願寺)와 가야산 수덕사(修德寺)의 불교 등도 이러한 수로 교통의 발달과 떼어 놓고 설명할 수 없다.
정해현과 여미현을 합현(合縣)한 까닭도 결국 고려 후기 및 조선 전기에 바다를 통해 들어온 왜구의 침탈과 관련되어 있듯이, 이처럼 해미 일대의 모든 문화적 양상은 해로의 운영과 매우 밀접하다. 또한 충청병마도절제사영이 덕산에서 해미로 이설된 까닭도 해로의 운영에 적합한 지리적 조건을 갖춘 전략적 거점으로서 해미가 선택되었기 때문이다.
[서해안의 수호처 충청병마절도사영의 설치]
조선은 건국 초부터 해안 방비를 위한 여러 가지 정책을 집중적으로 시행하였다. 태조는 평소 “국가에서 근심하는 바가 왜적보다 심한 것이 없다”라고 할 정도로 왜구에 대한 각별한 대책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고려 후기부터 자행된 왜구의 극심한 침입에 직접 대처하였던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당시 왜구는 전라도와 경상도의 해안뿐만 아니라, 내륙으로 넘어와 개경 인근까지 위협할 정도였다. 때문에 조선 전기 각지의 영(營)과 진(鎭)에 정책적으로 성(城)을 축조하는 한편, 산성에 대한 수축·개축도 동시에 이루어졌다.
충청도 병마도절제사영은 원래 덕산에 있었다. 1416년(태종 16) 조정에서는 당시 덕산에 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을 해안에 좀 더 가까운 곳으로 옮기고자 하는 논의가 시작되었다. 이듬해인 1417년(태종 17) 태종은 덕산에서 절제사를 지낸 이지실(李之實)을 충청도로 보내 병영을 이설하기에 적합한 곳을 살펴보게 하였고, 그 결과 지금의 해미 일대가 새로운 거점지로서 주목받게 되었다.
해미가 새로운 병영지로 선택된 데에는 이 지역이 서해안에 접경한 것은 물론이고, 그 위치가 이산(伊山)·순성(蓴城)·남포(藍浦) 3진의 중간 지점으로서 군사적으로도 효율적이었으며, 동시에 교통의 요지라는 점도 함께 부각되었다. 이러한 입지 선정과 준비 과정을 거친 후 1417~1418년 사이에 병영 신축이 진전되었고, 1418년 마침내 병영이 해미로 이설되기에 이르렀다. 이제 서산 해미읍성은 서해안 일대의 여러 고을들을 지키는 수호처로서 입지를 강화하게 되었다.
[자료를 통해 살펴본 충청병마절도사영]
아쉽게도 충청병마도절제사영[충청병마절도사영]의 성축 과정에 관한 자료는 충분하지 않다. 비교적 이른 시기의 기록이 1451년(문종 1) 9월 5일자의 실록 기사로, “해미현 내상성(內廂城)은 주위가 3,352척, 높이가 12척이고, 여장(女墻)의 높이는 3척이다. 적대(敵臺) 18개소 중 16개소는 아직 쌓지 않았고, 문은 4곳이다. 옹성(擁城)이 없으며, 여장이 688개, 해자(海子)의 주위는 3,626척으로 성안에 샘이 3개소가 있다”라고 하여 당시 병영성[해미현 내상성]의 건물 규모와 배치 상황이 확인된다.
비슷한 시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에 “본 현 동쪽 3리 지점에 있으며 석축으로 된 성이 있다. 둘레가 3,172척에 높이가 15척이며, 그 안에 3개의 우물과 군창(軍倉)이 있다”라고 간단하게 정리되어 있는데, 석축이 앞선 기록에 비해 다소 높아진 것으로 보아 개축을 통해 성벽의 규모가 다소 커진 듯하다.
이처럼 조선 전기인 1451년 즈음의 병영성은 어느 정도 윤곽이 마련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대체로 성곽의 규모는 기록에 남아 있으나 병영의 공해(公廨) 시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이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1491년(성종 22)에 남은 남문(南門)의 중수 기록을 참조하면 여전히 완벽한 축성은 이루어지지 못한 듯하다.
한편 성현(成俔)[1439~1504]의 「청허정기(淸虛亭記)」에 의하면 “영락(永樂) 병신년[1416년]에 이산에서 이설한 이래 겨우 남문만이 제 모습을 갖추고 있었는데, 그나마 70여 년이 지나 성문과 관사(館舍)가 날로 퇴이해져 중수하지 않을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병사 조숙기(曺淑沂)가 조정의 허락을 받아 내어 먼저 서문 사영(四楹)을 이루고 동문·남문·북문을 순차로 결구하였는데, “남문에 농석(礱石)과 홍예를 만들고 또 후원 솔밭에 정자를 지어 청허정(淸虛亭)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1491년에 이루어진 남문과 청허정의 중수 이후에도 몇 차례의 건물 증축이나 중수가 있었을 터이지만, 현재로서는 그 대략만을 유추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읍성의 개축과 보수]
서산 해미읍성은 그 지리적 조건과 군사적 중요성 때문에 언제나 국가적인 관심 속에 놓여 있었고, 수차례 개축과 보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서산 해미읍성에 대한 기록들 간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어 읍성의 정확한 옛 모습을 추정해 내기가 어렵다. 즉 초기 기록에는 해미에 ‘내상성’을 두어 덕산의 병마절도사영을 옮겼다고 하는데, 내상성이 지금의 읍성과 같은 것인지도 정확하지 않다. 지금의 서산 해미읍성이 건립되고 해미현의 치소가 성안으로 들어오기 전까지, 읍성에서 조금 떨어진 반양리 구해미에 현의 관아가 있었다. 읍성 연구자들 중에는 내상성이 구해미에 있었던 것일 수도 있다는 이들도 있는데, 여러 가지 기록을 종합해 볼 때 서산 해미읍성은 적어도 1491년 이전에는 축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서산 해미읍성에서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성곽과 진남문뿐인데, 성곽을 쌓을 때에는 여러 고을의 백성이 동원되었다. 조선 전기 축성법에 따르면, 성을 쌓은 지 5년 안에 무너질 경우 법에 따라 축성을 감독한 관리를 논죄하도록 하는 등의 조치가 취해졌다. 때문에 성벽의 중간 중간에는 축성 때마다 동원된 사람들의 출신지를 새겨 그 책임을 다하도록 하였다. 그중 남문 왼쪽 아래에는 “공주 백성이 쌓았다”는 글씨가 있고, 동문으로 가는 성벽 아래에는 “여기까지는 충주 백성이 쌓았고, 다음부터는 임천 백성이 쌓았다”고 새겨져 있다.
서산 해미읍성이 수축된 후 읍의 형편에 따라 읍성의 상태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읍이 피폐해져서 고을 사람들이 모두 병영으로 투속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한편 서산 해미읍성에 부임한 병마영의 군관 중에는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1545~1598]도 있었는데, 이순신은 1578년(선조 11)에 약 10개월 간 서산 해미읍성에 근무하며 활쏘기 등의 군사 훈련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충청병마절도사영의 이전과 호서좌영의 설치]
조선 전기 충청도 지역 육군의 최고 지휘부로서 권위와 상징성을 가졌던 해미의 충청병영성은 약 230여 년간 존속하였다. 그러나 군사적·전략적 입장의 변화와 더불어 1652년(효종 3) 청주로 이설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연이어 겪은 조정에서는 충청도의 중심에 위치한데다 영남과 호남에서 수도로 올라가는 통로에 해당하는 청주 일대의 지리적인 이점이 더욱 부각되었다.
당시 충청도에서도 서쪽으로 치우친 해미에 비해, 청주는 교통과 국방의 요충지일 뿐만 아니라 물산의 집산지였다. 또한 청주는 유사시 군사 동원이 용이하고 군량 수송과 보관을 위한 대규모 산성을 배후에 두고 있는 최적의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도회지를 통하여 필요한 군수품을 쉽게 조달할 수 있는 이점도 병영 이설의 중요한 조건 중 하나였다. 이미 인조 대에 병영의 이설 논의가 제기된 바 있었고, 이러한 근거를 바탕으로 영의정 김육(金堉)의 주장에 힘입어 충청병마절도사영은 청주로 이설되었다.
그러나 병영이 옮겨 간 뒤에도 해미는 여전히 서해안을 방어하는 중요한 군사적·전략적 요충지였다. 때문에 호서좌영(湖西左營)을 설치하여 예하에 13개 군현[대흥군·온양군·면천군·서산군·태안군·결성군·예산군·평택현·아산현·신창현·덕산현·당진현 등 호서의 북서부 지역]을 관할하게 하였다. 이후 숙종대에 일시 온양으로 토포영이 이속되었다가 곧바로 환속된 때를 제외하고 한말까지 호서좌영으로서의 지위를 잃지 않았다.
그런데 1651년(효종 2) 청주로의 병영이설과 호서좌영성 설치와 함께 커다란 행정구조 변화가 수반되었으니 해미현감과 영장을 겸하게 하는 겸영장제(兼營將制)가 바로 그것이었다. 겸영장제의 실시로 해미현감이 호서좌영장을 겸하게 되고, 이로써 해미읍성도 병영 자리로 이설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한편 영장은 토포사(討捕使)를 겸하고 있었으므로 해미는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의 본거지가 되었으며, 동학 농민 전쟁 때에는 홍주성을 공격하고 일시 퇴각하던 농민군이 이곳에 집결하는 등 서산 해미읍성은 역사적 사건마다 그 중심 무대가 되었다.
[해미읍성과 역사적 사건들]
해미읍성은 건립 자체가 해안 지방에 출몰하던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한 대비책의 일환이었으므로 왜구 침입과 관련 된 일화나, 임진왜란 직전인 1578년(선조 12) 충무공이순신이 병사영의 군관으로 부임하여 10개월간 근무한 사실 등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이후에도 해미읍성은 이 일대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있을 때마다 주요 거점으로 활용되곤 하였는데, 동학농민전쟁 때에는 내포지방에서 봉기한 동학군이 집결한 장소였으며, 패퇴하면서 관군과 접전을 벌였던 장소이기도 하였다. 그런가하면 내포지역의 한말의병들의 자취가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일대 해변에 이양선이 자주 출몰한 것이나 천주교의 초기 전파지로 활용된 것 등 다양한 역사적 경험들이 해미읍성에서 이루어졌다. 이는 역시 해미가 내포지역 군사·행정상 중요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해미현감 겸 영장은 토포사로도 불리면서 주변 속읍의 도적과 중범죄인을 잡아내는 직책이었으며, 체포된 죄인들을 처결하는 장소이었던 점도 주목하여야 한다. 그런가하면 동학농민군과 한말의병들은 전략적으로 유리한 거점을 확보하거나 지휘부로서 해미읍성을 활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