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05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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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杜宇寺大雄殿三尊佛像 |
이칭/별칭 | 뒷절부처,두우사 미륵불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물/불상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인지면 애정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여성민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780년 - 두어절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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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52년 - 두우사 제당 보수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89년 - 두우사의 법당 건립 |
현 소장처 | 두우사 - 충청남도 서산시 인지면 애정리 |
성격 | 불상|삼존 불상 |
재질 | 화강암 |
크기(높이) | 137㎝[본존불]|80㎝[우협시불]|79㎝[좌협시불] |
소유자 | 두우사 |
관리자 | 두우사 주지 강현성[법명 진여문(眞余文)] |
[정의]
충청남도 서산시 인지면 애정리 두우사(杜宇寺)에 있는 조선 후기 삼존 불상.
[개설]
두우사 대웅전 삼존불상(杜宇寺大雄殿三尊佛像)은 모두 석조이며, 두우사 대웅전에 본존과 협시불로 봉안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사찰에서 모시는 불상과는 의궤(儀軌)가 달라 민간 신앙에서 미륵(彌勒)이라고 하여 모시는 불상으로 보인다.
두우사 대웅전 삼존불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첫째는 부석면 월계리에 사는 박 서방이 해변에 떠밀려 있는 불상을 지고 가다가 무거워 인지면 애정리에서 쉬며 지게에 받쳐 놓았는데, 다시 지려고 하니 발이 떨어지지 않아 그대로 모셨다는 설이다. 둘째는, 부석면 월계리에 사는 박경진이 1760년(영조 36)에 가야산에 오르다가, 미륵불을 발견하고 마을에 모시고자 칡넝쿨로 멜빵을 만들어 월계리로 지고 갔다. 인지면 애정리에서 쉬었다가 다시 지고 가려 하니 발이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두어라”고 미륵이 말하므로 그대로 모셨다는 설화이다.
이때 미륵불은 현 법당 좌측의 야외 은행나무 옆 맨땅에 모셨는데 퍽 영험하여 자식 없는 많은 사람들이 소원을 빌어 자손을 보았으며 장수하였다고 한다. 그 후 1780년(정조 4)에 암자를 짓고 절 이름을 미륵이 말한 대로 ‘두어절’이라고 하였다. 현 관리자의 조부인 강창조는 1940년경 공주에서 인지면 애정리로 이사하였는데 당시 두어절에는 백암이라는 승려가 살았다고 한다. 그 후 1952년경에 제당을 보수하였다가 1989년 헐어 내고 현재의 법당을 지었다. 따라서 두우사 대웅전 삼존불상의 조성 연대는 240년 전으로 볼 수 있다.
절 이름과 관련하여 처음에 ‘두어절→두어사→두우사’가 되었다는 설과 서산시 인지면 애정리 마을 뒤편에 있다 하여 ‘뒷절→두애절→두우사’[한문으로 표기하기 위하여]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현재 두우사 대웅전 삼존불상의 소유자는 두우사이며, 두우사 주지 강현성[법명 진여문(眞余文)]이 관리하고 있다.
[형태]
본존불(本尊佛)의 높이는 137㎝이고, 우 협시불의 높이는 80㎝, 좌 협시불의 높이는 79㎝이다. 원통형 화강암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조각을 하여 손의 움직임이나 몸체의 표현이 제한되어 있다. 가운데 본존불은 목에 삼도가 표현되었고, 시무외여원인의 수인을 하고 있다. 본존불은 몸에 비하여 얼굴이 크게 표현되었으며, 목이 짧아 웅크린 자세이다. 의습(衣褶)은 우견편단(右肩偏袒)한 듯 주름이 약간 남았으며, 이마에 백호공이 있다. 얼굴에 눈썹, 수염 등을 그려 넣어 부처의 특색인 인자함보다는 근엄한 표정이 되었다.
좌우의 협시불은 왼손에 보주(寶珠)를 들고 있고, 오른손은 배 위에 놓아 왼손을 받치는 모습이다. 의습은 가운데 본존불과 같이 우견편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형태 면에서 협시불은 목이 길고 늘씬하여 본존불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전반적으로 조각 솜씨는 매우 거칠고 전면만 하였으며, 머리는 민머리이나 검은색으로 칠하였고, 또 얼굴은 노란색으로 칠하여 거친 부분을 메웠다. 협시불은 청광보살(淸光菩薩)과 신광보살(神光菩薩)을 상징한 것으로 추정된다.
[특징]
두우사 대웅전 삼존불상의 형태는 전반적으로 사실적인 표현보다는 추상적인 면을 강하게 보여 주고 있으므로 조성 연대를 조선조로 볼 수 있다. 더불어 초기에는 야외에 서 있었기 때문에 마을 주민 전체가 기원하는 마을 미륵으로 출발하였으나, 현재는 사찰과 함께 사유화되었다.
[의의와 평가]
불상의 얼굴을 크게 표현하는 형태적 특징으로 보아 조선 시대 지방의 형식화된 조각 양식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조선 후기 지방의 민간 조각 양식의 특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