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08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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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瑞山鄭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이해준 |
본관 | 서산 - 충청남도 서산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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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세장지 | 정신보|정인보 - 충청남도 서산시 성연면 오사리 |
성씨 시조 | 정신보 |
입향 시조 | 정인경 |
[정의]
정신보(鄭臣保)를 시조로 하고 정인경(鄭仁卿)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남도 서산시 세거 성씨.
[개설]
서산 정씨는 서산의 토착 성씨이며 서산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이다. 시조인 정신보[?~1261]는 원래 중국 송나라 사람이었지만 나라가 망하자 바다를 건너 고려로 들어와 망명하였다. 그 후 아들 대호군(大護軍) 정인경의 공으로 인하여 1182년(고려 명종 12)에 부성현(富城縣)이 폐현되어 청주, 공주, 운주[현 홍성] 뒤에 붙여 있던 것을 ‘지서산군사(知瑞山郡事)’로 복군시키는 공로를 세웠다. 이후 서산 정씨는 서산의 가장 유력한 성씨가 되었다. 정인경 사후 서산에서 그를 성황신으로 모실 정도로 큰 위세를 떨쳤지만 1600년대 정인홍의 몰락으로 인하여 가문의 위세도 크게 꺾이고 말았다. 현재는 서산시 내에 20여세대가 세거하고 있다.
[연원]
중국 송나라 사람이었던 정신보가 서해 간월도 해변에 은거한 후 후손들이 서산을 본관으로 하면서 서산 정씨가 되었다.
[입향 경위]
송나라에서 상서형부원외랑(尙書刑部員外郞)을 지낸 정신보가 몽골의 침략으로 송나라가 멸망하자 1237년(고종 24) 고려로 망명하여 서산 간월도에 은거하였다. 이곳에서 오세재(吳世才)의 증손녀인 고창군부인(高敞郡夫人) 오씨와 혼인하고, 그 아들 정인경이 고려 고종 말기에 몽고군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우면서 부성군이 서산으로 지명이 바뀌었다.
[현황]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를 제외한 서산의 지리지와 읍지류의 성씨조에 서산 정씨는 토착 성씨로 등재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의 인물조에서는 정인경이 항상 가장 먼저 기록되어 있고, 정인경을 고을의 성황신으로 모셨다고도 하니, 서산 지역사에서 서산 정씨의 위상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후손이 크게 번성하지는 못하였다. 1619년에 편찬된 사찬읍지 『호산록(湖山錄)』에는 고려조의 가장 훌륭한 성씨로 안씨, 정씨, 유씨가 있다고 하면서 당시 이미 한미해졌다고 한탄하고 있을 정도였다. 『호산록』의 인물조에도 정신보과 정인경 부자의 이름만 있을 뿐 그 후손의 모습은 찾을 수 없다. 이는 정인경이 말년에 수원으로 이주한 까닭도 있고, 1600년대 정인홍의 몰락이 서산 정씨가에 큰 영향을 미친 듯하다.
[관련 유적]
서산시 인지면 애정리에 위치한 송곡사(松谷祠)[현 송곡서원]에 정신보·정인경이 배향되어 있다. 송곡사는 서산에서 가장 먼저 건립된 사우로 1694년(숙종 20)에 창건되었다. 이는 성암서원[1719년 건립]보다도 20여 년 앞선 것이다. 창건될 때는 서령 유씨(瑞寧柳氏)가 주동이 되고 서산 정씨가 이에 협조하는 형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송곡사는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에 의하여 1871년(고종 8) 훼철되었고, 1882년(고종 19) 복설하고자 하였으나 성사되지 못하다가 1910년 9현의 위패를 봉안하게 되었다. 1984년 5월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207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