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08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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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積 |
영어음역 | Gim Jeok |
이칭/별칭 | 선여(善餘),단구자(丹丘子)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춘진 |
출생 시기/일시 | 1564년 - 김적 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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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09년 - 사마생원시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13년 - 평릉도찰방 재임 |
몰년 시기/일시 | 1646년 - 김적 졸 |
추모 시기/일시 | 1797년 - 서산 송곡사에 위패가 봉안됨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868년 - 서원 훼철령 시 대교촌 뒤편에 위패를 매안함 |
출생지 | 서산 |
거주|이주지 | 이주지 -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유계리 |
부임|활동지 | 안기도 - 경상북도 안동시 |
부임|활동지 | 평릉도 - 강원도 |
묘소|단소 | 묘소 - 충청남도 서산시 대산읍 대로리 |
사당|배향지 | 송곡사 - 충청남도 서산시 인지면 무학로 1353-9[애정리 495]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경주 |
대표 관직 | 안기도찰방 |
[정의]
조선 시대 서산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선여(善餘), 호는 단구자(丹丘子). 할아버지는 서산 지역에 자리 잡은 경주 김씨 입향조 김연(金堧)이다. 아버지는 증 좌승지 김호윤(金好尹), 부인은 화순 최씨(和順崔氏)로 좌윤 최원지(崔遠之)의 딸이다. 아들은 연산현감 김홍익(金弘翼), 김홍양, 김홍필, 충청도관찰사 김홍욱(金弘郁)이다.
[활동 사항]
김적(金積)[1564~1646]은 어머니의 외삼촌[외외종조부]이자 월사 이정구(李廷龜)의 아버지인 이계(李啓)로부터 이정구와 함께 글을 배웠다. 1609년(광해군 1) 사마생원시에 급제한 뒤 안기도찰방(安奇道察訪)을 거쳐 1613년(광해군 5) 평릉도찰방(平陵道察訪)을 지냈다. 그러나 광해군의 난정이 계속되자 탄식하고 사직한 뒤 가족을 이끌고 서산으로 낙향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다시 출사의 기회가 있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는데, 심지어 월사 이정구가 편지까지 보내 부임을 종용하였지만 “어찌 백수의 나이에 소년들 사이에서 종종걸음을 치겠는가?”라고 하며 끝내 부임하지 않았다. 자식에게는 학문을, 노복에게는 농사에 근면하기를 일깨우고 양성당(養性堂)을 지어 이곳에서도 후학을 양성하였다.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 기꺼이 불쌍한 사람을 도왔으며, 임진왜란 때는 수천 석의 곡식을 풀어 구휼에 힘썼다.
[학문과 저술]
현재 김적의 학문과 저술은 거의 전하지 않는다. 다만 김적의 행적은 아들 김홍욱의 문집인 『학주선생전집(鶴洲先生全集)』에 수록된 「선고행장(先考行狀)」에 비교적 자세히 남아 있다. 또한 서산으로 낙향하여 서산시 음암면 유계리에 은거하면서 주변의 사림들과 교유한 흔적인 단구대(丹丘臺)와 용유대(龍遊臺) 등의 유적이 전하고 있다.
[묘소]
묘소는 서산시 대산읍 대로리 먹수지마을 뒤편에 위치한다. 묘전에는 조익(趙翼)이 찬하고, 아들 김홍욱이 쓴 묘갈(墓碣)이 있다. 2011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410호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김적은 후일 아들인 학주 김홍욱의 공으로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1797년 서산 송곡사(松谷祠)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경주김씨족보』에 따르면 송곡사가 1868년(고종 5) 서원 훼철령에 따라 훼철될 당시 김적의 위패는 대교촌 뒤편에 매안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