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08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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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韓孝純 |
영어음역 | Han Hyosun |
이칭/별칭 | 면숙(勉叔),월탄(月灘)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해준 |
출생 시기/일시 | 1543년 - 한효순 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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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68년 - 생원시에 합격 |
활동 시기/일시 | 1576년 -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84년 - 영해부사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90년 -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파직 |
활동 시기/일시 | 1590년 8월 - 서산에 은거 |
활동 시기/일시 | 1592년 8월 - 영해에서 왜군을 격파하여 경상좌도관찰사로 승진 |
활동 시기/일시 | 1594년 - 병조참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96년 - 경상도·전라도·충청도의 체찰부사 |
활동 시기/일시 | 1599년 - 전선감조군관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03년 - 『신기비결(神器秘訣)』 편찬 |
활동 시기/일시 | 1604년 - 이조판서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05년 - 평안도관찰사·판중추부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606년 - 우찬성·판돈령부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610년 - 병으로 사직하고 서산에 은거 |
활동 시기/일시 | 1616년 - 좌의정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23년 - 인조반정으로 관직 추탈 |
몰년 시기/일시 | 1621년 - 한효순 졸 |
추모 시기/일시 | 1908년 - 신원(伸寃)되어 추탈된 관직 복구 |
거주|이주지 | 양림 한씨 동족마을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양림리 |
외가|처가 | 해미현 남면 덕천마을 - 충청남도 서산시 덕지천동 |
부임|활동지 | 영해부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
묘소|단소 | 한효순 신도비와 묘비음기(墓碑陰記)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서현동 산 63-1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청주 |
대표 관직 | 좌의정 |
[정의]
조선 시대의 문신이자, 서산시 해미면 양림리 청주 한씨의 입향조.
[개설]
한효순(韓孝純)[1543~1621]은 기축옥사(己丑獄死)에 연루되어 1590년(선조 23)에 파직되자, 같은 해 8월 지금의 서산시 해미면 양림리에 은거하였다. 이 일대에 선대에 하사 받은 땅이 있었는데 작은 농사(農舍)를 짓고 정착했다고 하며, 서산 강씨 강효윤(姜孝胤)의 딸을 후취 부인으로 맞았다. 그러나 곧바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해미현 남면 덕천마을[현 서산시 덕지천동]로 이거하였다.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면숙(勉叔), 호는 월탄(月灘).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한상경(韓尙敬)의 후손으로, 증조부는 한사무(韓士武), 할아버지는 한승원(韓承元)이고, 아버지는 어모장군(禦侮將軍) 한여필(韓汝弼)이다. 어머니는 유엄(柳渰)의 딸이다. 부인은 서산의 토성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서산 강씨 강효윤의 딸이다. 한효순이 서산 해미로 은거할 때 자식들도 함께 서산으로 내려왔다고 전하는데 그 중 여섯째 아들 한극겸(韓克謙)이 서산시 해미면 양림리에 정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후 한효순의 후손들이 서산시 해미면 양림리와 기지리, 인지면 산동리, 성연면 평리, 지곡면 화천1리와 무장1리 일대에 분파되어 살고 있다.
[활동 사항]
한효순은 1568년(선조 1) 생원이 되고, 1576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수찬을 거쳐 1584년 영해부사에 임명되었다. 1590년(선조 23)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파직된 후 선대에 하사 받은 서산 해미면 양림리 일대에 은거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8월 영해에서 왜군을 격파하여 경상좌도관찰사로 승진, 순찰사를 겸임해 동해안 지역을 방비하였다. 또한, 군량이 모자라다는 소식을 듣고 영남·호남을 직접 다니면서 곡식을 모아 명나라 군사의 식량을 대었으며, 이에 조정에서 병조판서·형조판서를 제수하였다.
1594년 병조참판, 1596년 경상도·전라도·충청도의 체찰부사(體察副使)가 되었다. 같은 해 통제사 이순신(李舜臣)과 함께 수군 강화에 힘썼으며,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정유재란이 일어나던 해 겨울, 부찰사로 명나라 장수 이유격(李遊擊)의 접대사가 되어 만나러 가던 중 잠시 해미면 양림리에 들렸다고 한다.
한편, 한효순은 부찰사로 명나라 장수를 따라 넓은 바다로 나갔다가 거친 풍랑을 만났는데, 당시 명나라 장수의 배는 뒤집혔고 한효순도 바다에 표류하게 되었다. 한여현(韓汝賢)과 종사관 곽설(郭說)이 이 소식을 듣고 바다를 헤매며 시체를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초혼제를 지내려 하던 중 표류하던 한효순이 남포에서 구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제사를 멈췄다고 한다.
1599년에는 전선감조군관(戰船監造軍官)으로 있으면서 거북선 모양의 소형 무장선인 창선(鎗船) 25척을 건조하도록 하였다. 1604년 이조판서에 이르렀으며, 다음해 평안도관찰사·판중추부사를 거쳐, 1606년 우찬성·판돈령부사를 역임하였다. 1616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이듬해인 1617년 인목대비의 폐출 문제로 대립이 격화되자 소극적인 자세로 관망하는 동시에 여러 차례 사직을 청하였으나, 1618년 폐모론을 실현시켜 서궁(西宮)에 유폐케 하였다. 1621년 세상을 떠났으며, 1623년 인조반정 후 관직이 추탈되었으나 1908년 신원(伸寃)되어 관직이 복구되었다.
한편, 『호산록(湖山錄)』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한효순이 덕천마을[현 서산시 덕지천동]에 살았다고 하며, 1610년(광해군 2)에는 병으로 사직하고 내려와 평민복을 입고 짚신을 신으며 산수를 즐겼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또한 서산시 해미면 양림리 부근에는 한효순이 1590년에 지었던 농사(農舍) 터가 전해 오고 있다.
[학문과 저술]
한효순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극복하는 과정 중 군사 전략 및 대명 외교에서 큰 활약을 하였다. 한효순은 이 같은 경험을 바탕으로 포진과 행군에 대한 『진설(陳說)』을 저술하였고, 1603년(선조 36) 함경도순찰사로 재직 중 각종 화약 병기의 제작과 사용법, 그리고 예부터 전해지는 여러 군사 전문 저서의 용어를 해석한 『신기비결(神器秘訣)』을 편찬하였다. 책의 마지막에는 한효순이 쓴 발문이 수록되어 있으며, 이는 전쟁사·군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묘소]
한효순의 묘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서현동 산 63-1번지 정좌(丁坐)에 있으며, 신도비와 묘비음기(墓碑陰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