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08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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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允謙 |
영어음역 | Yu Yungyeom |
이칭/별칭 | 형수(亨叟)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해준 |
[정의]
조선 전기 서산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서령[서산]. 자는 형수(亨叟). 할아버지는 유기(柳沂)[?~1410]이고 아버지는 유방선(柳方善)[1388~1443]이다. 서령 유씨는 고려 후기 및 조선 초기에 서산 지역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한 세거 성씨이다. 하지만 유기가 태종의 처남 민무구(閔無咎)·민무질(閔無疾)의 옥사에 연루되어 해남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되고, 아들 유방선·유방경(柳方敬) 등이 관노가 되는 등 집안이 풍비박산되었다. 하지만 1455년(세조 1) 유윤겸(柳允謙)[1420~?]이 사촌형 유휴복(柳休復)과 상소를 올려 서령 유씨는 다시 과거를 보고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활동 사항]
유윤겸은 아버지 유방선에게서 학문을 배웠는데, 특히 두보(杜甫)의 시에 능통하였다. 당시 유윤겸의 집안은 할아버지 유기가 태종 대에 왕실의 골육상쟁에 휘말려 가세가 완전히 기운 상태였다. 세종은 1443년(세종 25) 4월 『두시언해(杜詩諺解)』 편찬 사업을 시작하면서 두시(杜詩)에 통달한 사람이면 신분을 따지지 않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게 하였다. 글재주가 뛰어난 유윤겸은 사촌형 유휴복과 함께 이 기회를 잡았다.
이것이 서령 유씨 집안을 다시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1455년(세조 1) 유윤복과 유휴복은 ‘할아버지의 죄로 일족이 모두 관노가 되었는데, 이는 자신들이 태어나기 전의 일이니 특별히 과거에 응시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상소를 올려 왕의 허락을 받은 것이다. 이런 내용은 1455년 8월 26일자 『세조실록(世祖實錄)』에 기록되어 있다.
이후 유윤겸은 1462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헌부감찰, 성균관사성 등을 지냈다. 1480년(성종 11)에는 중국 명나라 사신들과 창화(唱和)[한쪽에서 구호를 외치거나 노래를 부르면 다른 쪽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화답하는 것]를 할 젊은 문신들에게 두시를 가르쳤다. 또한 왕명을 받아 서거정(徐居正)·노사신(盧思愼)·허종(許琮)·어세겸(魚世謙)·유순(柳洵) 등과 함께 『연주시격(聯珠詩格)』과 『황산곡시집(黃山谷詩集)』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도 하였다. 벼슬은 대사간을 거쳐 동부승지·호조참의·돈령부도정에 이르렀다.
[학문과 저술]
『두시언해』 간행 사업은 1443년(세종 25)부터 1481년(성종 12)까지 38년이 걸렸다. 유휴복은 당나라 두보의 시 전편을 52부(部)로 분류하여 한글로 번역한 『두시언해』 편찬 사업의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이 책은 원나라 때 편찬된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를 원본으로 삼아 두보의 시 1,647편과 다른 사람의 시 16편에 주석을 달고 한글로 번역한 것으로, 초간본(初刊本)과 중간본(重刊本)이 있다. 초간본은 유윤겸(柳允謙)을 비롯하여 유휴복, 승려 의침(義砧), 조위(曺偉) 등이 주해를 붙였다. 『두시언해』의 본래 이름은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로, 국어 국문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