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9002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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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福音- |
영어공식명칭 | Bogeumjari-maeul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신천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종남 |
[정의]
경기도 시흥시 신천동에 있었던 자연 마을.
[개설]
복음자리마을은 1977년 도시 빈민 운동가 제정구(諸廷坵)와 정일우(鄭日祐) 신부[John Vincent Daly]의 주선 아래 서울 양평동, 문래동 등 안양천 주변의 판자촌 철거민이 처음 세운 마을이다. 이후 서울 시흥동, 난곡동, 사당동, 목동 등의 철거민들이 들어와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었다.
[명칭 유래]
삶의 터전, ‘보금자리’라는 의미와 성서에 나오는 ‘기쁜 소리’라는 뜻을 지닌 복음자리는 1975년 말 도시 빈민 운동가 제정구와 정일우 신부가 서울 양평동에서 철거민들과 거주할 때 토론을 위해 모이던 5평[약 16.5㎡]짜리 사랑방 이름이다. 제정구와 정일우 신부의 주선으로 신천동에 새롭게 마을이 들어서게 되었으므로 복음자리마을이라고 명명하였다.
[형성 및 변천]
복음자리마을은 시흥시 오복동[2018년 현재 시흥센트럴푸르지오아파트 건설 중] 건너편 시흥대로 남쪽과 시흥군 소래면 신천4리[지금의 시흥시 신천동] 두문동 북쪽 사이에 자리하였다. 본래 복숭아, 사과, 배, 포도밭이었고, 초가와 슬레이트 지붕을 얹고 살았던 마을이었다. 남부순환도로 건설로 인하여 1977년 4월 12일 서울 양평동, 문래동 등 안양천 주변의 판자촌 철거민 170세대가 집단 이주하면서 새롭게 마을이 형성되었다. 철거민들은 빈민 운동을 하던 제정구와 미국인 정일우 신부의 주선으로 독일의 구호 단체인 미제레올(Misereor)재단에서 도움을 받아 토지 3,000여 평[약 1만㎡]을 사들였다. 그리고 평당 8만 원의 건축비로 각자의 능력에 따라 9평[약 30㎡], 12평[약 40㎡], 15평[약 50㎡]의 집을 지어 10월에 202세대가 입주하였다. 당시에는 단층 주택 여섯 동과 2층짜리 연립 세 동의 혼합된 형태와 600여 평[약 2,000㎡]의 넓은 공터가 있었다.
1979년 서울 시흥동, 난곡동, 사당동 등지에서 철거가 이루어지자 또 다른 철거민들이 들어와서 인근[은행동]에 164세대의 한독주택을 지었고, 1985년에는 서울 목동 지역 철거민들 105세대가 목화연립을 지어 들어왔다. 이들은 모두 공동체로 묶였으며 갈등과 화합을 거듭하며 복음자리마을을 이루었다. 이주민들의 경제적 개념과 공동체 의식을 높이기 위하여 복음신용협동조합을 설립했으며, 해마다 복음 단오제를 열어 화합을 다지는 마을 잔치를 열기도 하였다. 1985년 2월에는 마을 사람들의 복지를 위한 작은자리복지관 건물을 세웠다.
그러나 주변의 빠른 변화와 도심의 성장으로 복음신용협동조합은 경기시흥신용협동조합으로 개명했고, 복음 단오제는 2003년 중단되었다. 복음자리 공동주택도 철거가 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2010년에 건설한 총 7개동 313세대 신천휴먼시아아파트가 들어섰다.
[자연환경]
복음자리마을은 북서쪽으로는 소래산이 자리하고 서쪽으로는 신천, 동쪽으로는 멀리 은행천이 흐른다.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어 주변에는 작은 공원만이 있으며 대부분 도로와 상가, 주거 지역이 들어섰다.
[현황]
복음자리마을이 있던 곳에는 2018년 현재 신천휴먼시아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복음자리 주민들의 회관 역할로 시작되었던 작은자리복지관은 작은자리종합사회복지관으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2006년 건물을 새롭게 지어 주민들의 평생교육과 복지의 기회를 넓히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모습 어디에서도 복음자리마을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오직 버스정류장의 이름으로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